“반대파 포용” 쓴소리 무시… 내전에 자멸한 미토번 영주[박훈 한국인이 본 일본사]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2024. 1. 4.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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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번의 다이묘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그린 그림. 반대파에 의해 실각하며 이성을 잃기 전까지 그는 유능한 인물을 기용해 토지 조사, 불교 억압 같은 파격적 개혁을 시행한 명군이었다. 아래쪽은 그가 가신들에게 보낸 서한.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아마존 홈페이지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1800∼1860)라는 다이묘(大名·봉건영주)가 있었다. 도쿄의 동북쪽 일대에 있던 미토(水戶)번이라는 봉건국가의 영주였다. 정실에게서 난 형이 세자로 있었으니, 측실 자식인 그는 평생 한편에 찌그러져 있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병약하던 형이 젊은 나이에 죽었다. 나리아키의 인물을 눈여겨보던 젊은 사무라이들은 즉시 그를 세자로 밀어 올리는 운동을 벌여 1829년 마침내 다이묘가 되었다.》




나리아키 개혁 함께한 후지타

나리아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신하 후지타 도코. 사진 출처 일본대백과사전 홈페이지
나리아키는 자기에겐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젊은 시절 남몰래 개혁을 구상해 왔었다. 이제 그 정책들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갔다. 미토번의 ‘덴포(天保)개혁’이다. 일약 ‘명군(名君)’이 되었고, 막부 정책도 비판하기 시작했다. 명군 뒤에는 ‘명신(名臣)’이 있었으니 후지타 도코(藤田東湖·1806∼1855)다. 천하의 호색한이었던 주군에게 후지타가 “제발 여색을 조금만 멀리하시라”고 충언하자 나리아키는 “그대는 술을 좀 작작 마시시오”라고 해, 호주가인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야말로 ‘수어지교(水魚之交)’였다. 나리아키는 후지타를 비롯해 신분은 낮으나 유능한 인물들을 대거 발탁해 토지 조사, 불교 억압 같은 파격적인 개혁을 해나갔다. 그와 후지타는 ‘계급장 떼고’ 토론을 벌이며 최선의 정책을 찾아 헤맸다.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그러나 세상의 박수를 받던 나리아키의 개혁은 1844년 된서리를 맞았다.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막부는 은거(隱居) 명령을 내리고, 그의 아들을 새 다이묘에 임명했다. 강제 사퇴당한 것이다. 나리아키는 총애하던 중신 유키 도라주(結城寅壽)가 음모를 꾸며 자신을 실각시킨 것으로 의심하며, 분노에 차 어쩔 줄 몰라 했다. 잠깐만 옆으로 새겠다. 유키는 명문가의 자제로 젊고 뛰어난 미남이었던 모양인데,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나리아키와 가까웠던 에치젠(越前)번 다이묘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에 따르면 나리아키가 “색욕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유키의 잘생긴 용모에 빠져, 그를 남색(男色)의 대상으로 삼았다. 유키도 간악한 자였으므로 때때로 이에 응해 공(公)에 아부하여 남색의 유락(遊樂)이 거듭되었다”는 것이다.

이성 잃은 주군에 쓴소리

정치적 미움 때문인지, 연인에 대한 배신감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유키와 그 당파에 대한 증오로 나리아키는 이성을 상실했다. 이때부터 미토번 내의 나리아키파와 막부파 간에 격렬한 당쟁이 벌어졌다. 나리아키는 다이묘로서 가신단을 통합하기는커녕 추종자들을 선동하여 미토번을 양 진영으로 갈라놓았다. 후지타는 이러다 미토번이 두 쪽 날 수 있다며 나리아키에게 반대파를 포용하라고 진언했다. 진짜 지도자의 역량은 위기상황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그런데 이때 나리아키는 오히려 진영싸움을 주도했다. 후지타의 충언도 점점 귀찮아했다.

후지타는 ‘쓴소리’를 하기로 작정하고, 주군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섰다. 그는, 문벌파(門閥派)를 대표하던 유키가 중하층 사무라이들의 정치적 도전을 막으려고 막부에 공작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나리아키의 폐위까지 의도한 것은 아닐 거라며 “다만 약발이 지나치게 들어서, 노공(老公·나리아키)까지 이같이 되신 것에는 유키도 놀랐을 것”이라고 나리아키를 달랬다. 또 나리아키를 몰아낸 혐의를 받고 있는 문벌파 대신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해서, 그들이 심복하게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적대하지는 않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리아키의 마음을 읽은 과격파들은 더욱 설쳐댔다. 그들은 스스로 ‘유지(有志)’라고 칭하며, 상대 진영을 싸잡아 간신배라고 공격했다. 후지타는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해도 같은 가신단에게 간신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며 “제가 생각해 보건대, 간인(姦人)이라고 할 정도의 자는 아무리 봐도 안 보이고, 공자가 말하는 비부(鄙夫)만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것도 간(姦), 저것도 간이라고 지목한다면, 점점 비부(鄙夫)의 당류(黨類)는 많아지고, 당대뿐 아니라 자자손손까지 파를 나누고 당을 세우게 되어 국가영세(國家永世)의 대해(大害)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상대방이 못났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아무에게나 ‘간(姦)’의 ‘레테르’를 갖다 붙이면 대화와 협상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상대 당이라고 무조건 악마화하면 진영 대립은 깊어지고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매우 힘들 것이었다.

후지타 호소에도 자멸한 나리아키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사망한 뒤 미토번의 가신들이 일으킨 텐구당의 난을 그린 그림. 나리아키는 반대파를 포용해야 한다는 후지타의 충고를 듣지 않았고, 이들을 가혹하게 숙청했다. 결국 미토번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휩싸여 자멸하고 말았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당시 나리아키 일파는 보안을 위해 ‘신발가나(神發假名)’라는 암호 비슷한 문자를 사용하기도 했고, 은명(隱名·사람의 이름을 보안상 은어로 표기하는 것)을 쓰기도 했다. 아무리 보안 때문이라지만 누가 봐도 정도(正道)는 아니었다. 후지타는 이런 식으로 해서는 상대방을 ‘간사하다’고 하는 사이에 이쪽도 간(姦)에 휩쓸리게 될 것이라며, 일을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디까지나 광명정대(光明正大)의 기상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이 정도로 간언(諫言)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이런 심복을 옆에 둔 주군은 행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리아키는 끝내 후지타의 호소를 듣지 않았다. 몇 년 후 권력을 되찾자 그는 유키부터 종신금고형에 처했다. 후지타는 종신금고라는 극형을 내리면 퇴로를 차단당한 그 일파가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라며, 일정 기간 구금하는 데 그치도록 진언했다. 유키가 종신금고를 당하자 후지타의 우려대로 그 일파는 극렬한 저항에 나섰고, 나리아키는 결국 유키와 그 일당들을 아예 처형해버렸다. 이쯤 되자 양 진영 간 원한은 걷잡을 수 없게 되고, 결국 미토번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휩싸여 자멸했다.

쓴소리는 누구나 싫다. 가족이 해도 싫은데 신하나 부하의 쓴소리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성공에는 필수요소다. 한두 번까지는 불쾌한 걸 참고, 귀를 열던 사람도 그 이상 계속되면 등 돌리고 싶어진다. 바로 여기가 위대한 지도자와 범부(凡夫)가 갈리는 지점이다. 동서고금, 예외가 없었다. 귀에 달콤한 말은 다 독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 누리는 권력은 쓴소리로만 유지될 수 있다. 그 대신 권좌에서 내려왔을 때, 달콤한 찬사가 쏟아질 것이다.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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