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민의 코트인] 송골매 군단이 멈춰 세운 상무의 연승 시계
“이거 뭔데...? 미쳤다 미쳤어”
한창 LG와 상무 경기가 진행 중인데, 다음 경기를 위해 멀리서 워밍업을 진행 중이던 DB와 현대모비스 선수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워밍업은 고사하고 그들 역시도 앞뒤로 바삐 움직이며 전광판 점수 확인에 열중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6인 로테이션을 가동하던 LG가 ‘D리그 최강’ 상무를 잡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 이젠 식상할 법도 하지만, 상무는 각자 소속팀에서 주축 선수 혹은 키 식스맨으로 구성된 화려한 팀이다.
경기 결과 일지를 넘겨도 넘겨도 승밖에 보이지 않는 팀, 2022년 12월 20일부터 2024년 1월 4일 전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팀이자 오히려 패배를 해야 주목받는 팀. 그게 상무다.
반대로 이날 LG가 코트에 내세운 선수 중 절반은 최근 한국 농구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익숙지 않은 선수였다. 2라운드 10순위 이승훈, 3라운드 1순위 박준형, 다시 말하면 프로 세계에서 가장 마지막에 선발된 선수들이기도 하다. 여기에 올 시즌엔 정규리그에서 자취를 감춘 한상혁과 이승우까지.
잠시 시간을 12월 21일로 돌려보자. 똑같은 장소, 똑같은 요일에 LG와 상무는 D리그 첫 번째 맞대결을 가졌었다. 당시 LG는 박정현과 윤원상을 필두로 경험이 두둑히 쌓인 선수들을 돌격 대장으로 내세워 상무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누구는 너무나 익숙한 패배의 쓰디쓴 맛을 상무는 22년도부터 잊고 말았다. 그 맛을 상무에 LG가 23년 마지막 경기에서 안겨주나 했더니, 변준형과 한승희의 투맨쇼가 가로막고 말았다.
24년 새해가 밝았고, LG의 상황은 더 열악해진 상태로 또 그들을 마주했다. 탄력을 받은 상무 선수들은 경기 시작부터 여유가 흘러넘쳤다. D리그 경기를 중계하는 카메라도, 많지는 않지만 관중석에 삼삼오오 모이는 팬들도, 모두의 스포트라이트는 항상 상무에게 쏘여졌다.
“상무뿐만 아니고 어떤 D리그 경기를 해도 전부 다 같은 프로 선수에요. 나이가 많다고 해서 거들먹거리는 것도 없고 저도 어린 친구들한테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거든요. D리그는 정말 정규리그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요. 한 경기를 뛸 때도 항상 좀 간절하게 임하는 것 같아요”
D리그 선수단을 통솔하고 그중 최고참이던 한상혁이 말해왔다. ‘이가 없으면 잇몸’, ‘상무보다 한 발 더’ 뛴다는 마인드로 팁오프에 나섰던 송골매 군단.
간절함과 노력이 빛을 발한 걸까. LG는 이승우를 필두로 1쿼터에만 32점을 몰아치며 두자릿 수 격차를 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2쿼터 종료 당시 양 팀의 간격은 밤새 짧게 내리고 사라진 눈보라처럼 없어지고 난 뒤였다. 해봤자 고작 ‘3점’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었다. 12월 21일과 동일한 경기 패턴. LG가 3쿼터까지 근소하게 앞서다가 결국은 상무가 이기는 그 그림.
시간이 흐를수록 상무 불사조 군단은 LG의 숨통을 조여왔다. 변준형이 화려한 드리블로 LG의 수비를 무너뜨리면서 관중들의 환호성을 자아 해냈다.
그러나 LG는 12월 21일 재방송이 싫었었나 보다. 이승우가 선봉장으로 나섰고, 여기에 이승훈과 김준형이 양쪽에서 펑펑 3점슛을 터뜨렸다. 점점 과열되는 경기의 분위기에 임동섭은 퇴장, 이승우와 이승훈도 4반칙. 나머지 선수들도 최소 3반칙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필자마저도 “또 상무가 이기겠네...”라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코트에서 땀방울을 흘리는 선수들도 자칫하면 손아귀에 들어온 승리를 허무하기 놓칠 수 있던 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LG 선수들은 파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내던지고 부딪쳤다. 그 과정에서 경기를 운영하고 책임지는 야전사령관의 한상혁이 유파울과 연속 턴오버를 범하기도 했다.
“지난 12월 21일 경기가 갑자기 떠오르더라고요. 근데 상무가 파울 작전을 할 것 같았어요.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제가 끝까지 경기 책임을 지고 싶었어요. 정규리그엔 많이 나서지 못했지만 연습과 노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슛엔 자신 있거든요”
한상혁의 자신감 넘치던 멘트는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한상혁은 이날 자유투 10개 시도해 10개 성공, 18점 7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이승우와 함께 상무를 무너뜨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한상혁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얼굴에 미소를 띰과 동시에 무릎을 부여잡았다. 이날 한상혁은 장염 증세가 있는 최악의 컨디션으로 풀타임을 소화한 유일한 선수였다. 경기 도중엔 근육까지 올라와 어려웠던 설상가상의 상태였다. 그러나 LG에 안정적으로 볼을 운반할 수 있는 가드는 한상혁이 유일했다.
책임감이었다. 그리고 고참 한상혁은 후배 선수들에게 공을 돌렸다.
“기록지에도 나타났겠지만, (이)승우를 포함해 6명 선수 모두가 잘해줬어요. 특히 승우한테 많은 걸 부탁했는데 너무 잘해줘서 고맙다는 말 꼭 전해줬으면 해요”
“LG 선수들,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안 보이는 곳에서 하고 있어요. 그러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관심도가 적은 D리그 경기에서도 항상 열심히 뛸 수 있는 것 같아요(웃음)”
신기하게도 상무는 패배했음에도 선수들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겐 그들은 간절히 넘고 싶던 상대였었다. 언더독이 탑독을 잡는 그림은 스포츠 세계에서 언제나 짜릿함을 선사한다.
2024년 1월 4일, 상무의 연승 시계는 다시 새로 리셋됐다. 그리고 상무는 다시 재무장을 시작한다.
#사진_문복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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