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피의 보복’ 선언... 중동 확전, 일촉즉발 위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의 전쟁이 전례 없는 범(汎)중동전쟁으로 번질 우려가 한층 커지고 있다. 이란이 3일(현지 시각) 자국민 95명의 목숨을 앗아간 폭탄 테러 배후로 이스라엘과 미국을 지목했다. 이란이 보복을 명분으로 군사행동에 나선다면 중동 전역이 전쟁의 격랑에 휩쓸리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4일 이란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전날 오후 3시 수도 테헤란에서 남동쪽으로 약 800㎞ 떨어진 케르만의 ‘순교자 묘역’ 인근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사망자는 95명, 부상자는 200명으로 집계됐다. 이슬람혁명수비대와 경찰이 강력한 공권력으로 치안을 장악한 이란에서 보기 드문 대형 테러다. 이란 당국은 “도로 인근에 놓인 폭발물이 담긴 가방 2개가 원격 조종으로 폭발했다”고 밝혔다.
이란은 이 테러가 혁명수비대 정예 부대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의 4주기 추도 인파를 겨냥했다는 데에도 충격을 받았다. AFP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더 많은 관심이 쏠리면서 수만 명의 추모 행렬이 묘역 밖 도로까지 이어져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이란 정부 고위 인사들은 잇따라 이스라엘과 미국을 배후로 지목하고 보복을 공언했다. 모하마디 잠시디 대통령 정치고문은 소셜미디어에 “이 범죄 책임은 미국과 시오니스트(유대민족주의자·이스라엘을 일컫는 말) 정권에 있다”고 했다.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도 “사악한 ‘이란의 적’들이 또 재앙을 일으켰다. 신의 뜻에 의해 처리될 것”이라며 미국과 이스라엘을 겨냥했다.
이번 테러는 이란 또는 친이란계 인사가 잇따라 공격받아 사망하는 상황에서 벌어졌다. 전날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인근에선 이스라엘의 드론 공격으로 하마스 최고위급 간부 살레흐 알아루리 등 6명이 사망했다. 앞서 지난달에는 사이드 라지 무사비 이란 혁명수비대 소장이 시리아에서 이스라엘의 표적 공습으로 사망했다. 그는 솔레이마니의 측근이기도 했다.
이 사건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게 이란의 주장이다. 나세르 카나니 외무부 대변인은 “시오니스트 정권이 테러와 범죄에 기반하고 있음이 다시 한번 입증됐다. 저항에 불이 붙을 것”이라고 했다. 드론 공습과 폭탄 테러가 모두 이스라엘의 소행이고, 향후 보복이 정당하다는 의미다.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 단체 헤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도 3일 “(베이루트 외곽의 드론 공격은) 우리가 침묵할 수 없는 중대 범죄”라며 “적(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이려 한다면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계속 확전의 우려를 낳아왔다.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헤즈볼라와 시리아의 친이란 민병대도 하마스를 거들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스라엘로서는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 격퇴전을 벌이는 동시에, 북부 접경에서 미사일 공격 등을 주고받으며 사실상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됐다. 예멘의 친이란 세력인 후티 반군까지 가세했다. 이스라엘을 겨냥해 드론 공격을 감행한 데 이어 홍해를 지나는 다국적 상선들을 무차별 공격해 세계 물류에 타격을 입혔다.
이슬람 소수 종파 시아파의 맹주 이란은 이스라엘을 자국의 최대 안보 위협으로 간주하면서 시아파 무장 단체인 헤즈볼라와 후티, 종파는 다르지만(수니파) 반이스라엘이란 공통점을 가진 하마스까지 오랫동안 지원해 왔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발발 후엔 반이스라엘 세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직접 개입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국에서 발생한 대형 테러를 빌미로 이란이 직접 참전할 명분이 생겼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란이 군사행동에 나설 경우, 전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 될 수 있다. 이란은 국제사회의 감시를 피해 오랫동안 은밀하게 핵 개발을 해왔다는 의심을 받아왔고, 이스라엘은 비공식 핵보유국으로 간주되고 있다.
미국은 자국과 이스라엘이 이번 테러에 관련됐다는 이란 주장을 강력 부인했다. 매슈 밀러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이 관여됐다는 주장은 터무니없으며, 이스라엘이 이번 폭발에 연루됐다고 믿을 이유도 없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침묵하고 있다. 미국은 이번 테러는 2014~2018년 이라크·시리아에서 발호한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 단체 이슬람국가(IS) 소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미국의 추정이 사실이라면 움츠러들었던 IS가 부활을 알리며, 이번 전쟁에 이슬람 종파 분쟁까지 얽힐 수 있다는 새 걱정거리가 생기게 된다.
☞솔레이마니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의 대외 작전 부서 쿠드스군(軍) 사령관(소장)으로,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심복이자 군부 실세였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IS 격퇴에 큰 공을 세우며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차기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됐다. 2020년 1월 3일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미국의 무인기 MQ-9 리퍼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숨졌다. 한 달 전 이라크 내 미군 기지와 미국 대사관을 겨냥한 친(親)이란 무장 세력의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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