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누가 세상을 무너뜨리는가
한 해의 마지막 날, 묵은 숙제를 해치우듯 <서울의 봄>을 온가족이 봤다. 사람들이 영화 이야기를 할 때도 썩 내키지 않았다. <살인의 추억> 때 숨을 쉴 수 없었던 것처럼, 현실에 기초한 비극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가 났을 때도, 김용균의 사고 때도,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뉴스는 보지 못했다. 감당할 자신이 없고, 우선 몸이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런 일들은 너무나 사실이라서, 현실에서 늘 반복되기에, 볼 자신이 없다. 굳이 그렇게 떠올리지 않아도 항상 일어나는 고통을, 왜 내 돈 주고 극장까지 가서 봐야겠는가.
그럼에도 결국 어쩔 수 없었다. 내 맘에 들든 안 들든 1000만의 관객이 봤다는 영화는 봐야 한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사회과학도에게 피할 수 없는 형벌이다.
열 살 아이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떤 것은 대답할 수 있었고, 어떤 것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이는 전두광의 무리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들이 그날 밤에 왜 그랬는지는 열 살 아이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왜 전두광이 시민들을 통제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언제나 전두광 같은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을 거대한 한판의 게임으로 생각하는 전 근대적 폭력 집단이다. 그들은 제국주의적 망상에 빠진 과거 일본 육군의 후예들이다.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육군>이 묘사하고 있는 그들은 만주사변과 진주만 폭격으로 세계를 전쟁에 몰아넣고 자국민들조차 고통 속에 빠뜨렸지만, 결코 반성할 줄 모르는 광기적 집단이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반성할 것이 없다. 호사카 마사야스는 쇼와 육군의 속성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주 대담하게 준비해서 아무렇지 않게 단행한다. 대의를 내세우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쇼와 육군이, 사건으로는 실패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성공한 1936년 2·26 쿠데타를 통해 국가를 장악했듯이, 박정희와 전두환도 국가 권력을 찬탈했다. 쇼와 육군이 난징에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했듯이 그들도 부산, 마산, 광주에서 시민들을 죽였다. 아이는 국방부 장관에 대해서도 이해했다. 일신의 안위를 위해 원칙과 대의를 깡그리 무시하는 비겁한 기득권자는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다. 세상에는 그런 자들이 늘 존재한다.
아이는 이태신의 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아이는 이해하고 있었다.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헌병감 김진기 준장, 특수전사령부 김오랑 중령, 국방부 헌병중대 정선엽 병장 같은 사람들이 드물어도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다만 장태완의 외동아들이 행방불명 후 의문사하고, 정병주가 실종된 지 130여일이 지나 목을 맨 채로 발견되고, 김진기가 평생 악몽에 시달리고, 김오랑의 부인이 의문사하고, 정선엽 병장의 추모비를 국방부가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럽다.
그러나 아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고 내가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던 무리는, 육군본부에 모여 있던 오합지졸들이다. 그들은 12·12 쿠데타의 본질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영화에서 전두광은 말한다. ‘우리 박정희 각하는 누가 또 쿠데타 일으킬까봐 어디서 저런 등신들한테만 별을 달아 줬을까.’ 진위는 알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그런 존재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하나회라는 사조직에 충성할 만한 배짱이 없었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전두광에게 서둘러 엎드릴 만한 판단력도 없었다.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해 쿠데타를 진압할 책임감도 없었고, 육군본부를 지킬 만한 최소한의 양심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지금 자기들의 이마와 어깨에 달려 있는 별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무능한 자들이었다. 정신 좀 차리라는 헌병감의 간곡한 외침과 특전사령관의 호통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대체로 상황을 낙관하다가 막상 급한 일이 닥치면 누구랄 것도 없이 제 살길을 찾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늘 본인의 대의나 곤궁한 상황을 과장하게 마련이다.
아이에게 말했다. 세상에는 항상 전두광과 같은 무리가 있다. 이태신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자들은 육군본부에 있던 무리다. 그들은 엄숙하게 반란을 선언하고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여 적을 욕한다. 그래서 우리는 진압군이 다수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싸움이 벌어지면 맨 먼저 도망친다. 원칙을 버리고 유불리만 따지다가 엉뚱한 곳에서 타협을 시도한다. 그런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세상을 무너뜨리는 것은 결국 그들이다.
이관후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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