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쓰고 달콤한 경제] 경기 사이클이 달라졌다
필자는 1996년부터 증권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직장 생활 초기 10여년은 그야말로 ‘다이내믹 코리아’를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사원 때 외환위기가 터졌고, 대리가 되니 당시 3대 재벌이었던 대우그룹이 파산했다. 과장으로 승진하니 카드위기로 경제가 휘청였고, 차장 때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불길이 한국으로 옮겨붙었다. 각각의 위기는 대형 금융기관들의 파산 위험이 수반되며 금융시스템과 실물경제가 동시에 흔들리는 시스템 리스크로 비화됐고, 그때마다 한국 증시를 대표하는 코스피는 50% 이상 급락하면서 소위 반토막이 나곤 했다.
외환위기 때부터 글로벌 금융위기까지의 시기는 경제에 큰 충격을 주는 이벤트가 주기적으로 발생했던 위기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한국 경제가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역동성을 보여줬던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 경제는 회복 탄력성이 매우 강했다. 1997년부터 2008년까지 네 차례의 커다란 위기를 겪으면서도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연평균 5.0%에 달했다. 코스피 역시 이 기간 동안 저점 대비 100%가 넘게 상승하는 급등 장세가 세 차례나 나타났다.
반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십수년은 한국 경제에 큰 위기가 돌출되지 않았던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다. 2012~2013년에 조선사와 건설사들이 대규모 손실을 일시적으로 회계장부에 반영했던 ‘빅 배스’가 있었고, 중간중간 부동산에 대한 우려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과거에 경험했던 시스템 리스크와는 거리가 멀었다. 큰 위기가 없었지만 한국 경제의 성장 속도는 현저하게 둔화됐다.
위기 없는데 경제 역동성 약해져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부터 2023년까지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2.7%였다. 주가지수의 움직임도 밋밋해져 2008년 이후 코스피 연평균 상승률은 1.8%에 불과했다. 심각한 위기는 없었지만 한국 경제의 역동성도 약해졌다.
특히 작년이 그랬다. 특별한 위기가 없었음에도 1.3%로 추정되는 2023년 GDP 성장률은 경제개발이 본격화됐던 1960년대 이후 역대 다섯 번째로 낮은 수치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기가 안 좋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있지만, 성장률이 이례적으로 낮았던 2023년은 실제로 그랬던 해였다.
경기는 수축과 회복의 사이클을 그리게 마련이고, 때론 작년처럼 낮은 성장률이 기록될 수도 있다. 주목해서 봐야 할 점은 회복의 패턴인데, 과거 한국 경제는 잠재성장률을 크게 하회하는 경기침체 직후에는 예외 없이 V자형 급반등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고통은 짧았고, 정상화의 속도는 빨랐다.
2023년보다 성장률이 부진했던 과거 네 차례의 사례들을 복기해 보자. 미국의 고금리와 2차 오일쇼크가 겹쳐져 나타났던 1980년 한국의 GDP성장률은 -1.4%를 기록하면서 최초의 역성장을 기록했지만, 이듬해인 1981년에는 7.0% 성장이라는 급반등세를 기록했다. 외환위기 국면이었던 1998년 GDP성장률은 -5.1%를 기록했지만 1999년에는 11.4%를 나타냈고,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0.8%에 그쳤던 성장률은 2010년 6.8%의 반전으로 귀결됐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있었던 2020년 성장률은 -0.8%, 이듬해는 4.3%의 성장률이 기록됐다.
2024년 GDP 성장률과 관련된 자본시장의 컨센서스는 2.0%이다. 작년보다는 개선될 것으로 보이지만, 과거 침체 직후에 곧바로 나타났던 V자형 반등과는 거리가 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어지고 있는 회복 탄력성의 약화가 2024년 성장률 전망치에도 투영돼 있다.
회복의 강도도 약하지만 내용도 수출 편향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2024년 성장률 반등은 작년 경기가 부진했던 데 따른 기저효과와 수출 개선, 특히 반도체 경기 회복에 거의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반도체 경기 반등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반도체 수출 증가가 국민 경제 전반으로 파급되는 낙수 효과는 크지 않다. 오히려 내수에서 뚜렷한 반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민간소비·설비투자·건설투자·정부지출 등 내수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 요소들은 모두 구조적 정체에 빠져 있다. 가장 중요한 민간소비는 가계부채에 발목이 잡혀 있다. 가계부채가 GDP의 100%를 넘어서고 있는 상황에서 금리마저 높아져 가계의 소비 여력 위축은 불가피하다. 설비투자도 크게 늘어나기 어렵다.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투자하고 있지만, 해외에 투자하기에 바쁘다. 특히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Chips Act) 등에서 제시하고 있는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미국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 기업의 해외투자는 한국의 GDP에 기여하지 못한다. 설비투자보다 절대 규모가 큰 건설투자는 아직도 GDP의 10%를 넘어서고 있을 정도로 과잉이다. 주요국 중 건설투자가 GDP의 10%를 넘어서는 국가는 한국과 중국 정도뿐이다. 박근혜 정부 후반부인 2015년부터 성장 기여도가 높아졌던 재정지출은 재정 건전성을 중시하는 보수정부의 스탠스를 감안할 때 경기 확장의 촉매로 작동하기 어려워졌다.
정부 더 적극적인 역할 모색해야
2024년에 예상되는 미약한 경기 회복은 구조조정과 관련해 심각한 화두를 던진다. 지금까지는 어려운 경기 사이클에서 잘 버티기만 하면, 그리 긴 시차 없이 전개되곤 했던 강력한 경기 회복 과정에서 재기의 발판이 마련되곤 했다. 그렇지만 침체 이후 경기 반등의 강도가 약할 가능성이 높다면 버틴다고 능사가 아니다. 자영업이건, 부동산PF건, 시간을 가지더라도 회복되기 힘든 취약 영역의 구조조정은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민간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한 정부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구조조정을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는 없고, 정부도 재정 건전성이라는 원칙에 갇히기보다는 더 적극적인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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