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증거수집제도·원스톱 분쟁 해결로 기술탈취 차단 [지방기획]
솜방망이 처벌이 범죄 키워
대만 기술유출 범죄 간첩 행위로 처벌
한국은 침해사범 98%가 2년 이하 징역
한해 기술유출 피해규모만 56조2000억
진화하는 기술유출 범죄
영업비밀 유출 76%가 내부인이 저질러
향후 침해품 몰수·추징 규정 신설 추진
알선도 침해행위 한 유형으로 포함 계획
고도화하는 방지 대책
특허 권리자 보호 ‘증거수집제도’ 도입
유출 신고 포상금에 처벌 수위도 높여
부처 공조로 분쟁 시 신속한 피해 구조
#.2 지난해 6월 삼성전자 전무 출신 B씨는 중국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복제하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B씨는 2018년 8월부터 2019년까지 삼성전자의 영업비밀인 반도체 공장 공정 배치도, 설계도면 등을 부정 취득·사용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는데 그가 고용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인력만 2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허청에 따르면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술탈취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같은 국내 기업에 의해서 발생하는 ‘국내탈취’와 국경을 넘어 해외 기업이 기술자료와 인력을 빼내 가는 ‘해외탈취’가 그것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우리나라 주력산업의 핵심 기술에 대한 해외탈취 시도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동시에 국내 기업 간의 기술탈취 분쟁도 지속되고 있다.
기술탈취 피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4일 국정원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실제로 적발된 해외유출 시도만 93건에 이른다. 유출 시 피해액은 25조원대 규모로 추산된다. 지난해 10월 한국경제인협회가 발표한 산업보안 전문가 인식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기술유출 피해 규모는 연 56조2000억원이다. 이는 2020년 우리나라 총연구개발비(93조1000억원)의 약 60.4%에 이르는 수치다.
최근 국내 기업 간에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는 기술탈취 분쟁의 경우 개별 기업의 피해를 넘어 우리나라의 기술혁신 생태계 자체에 악영향을 끼친다.
해외 경쟁국이나 경쟁 기업에 의한 기술탈취 문제도 심각하다.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고 디지털 전환이 가속되면서 주요국·기업들은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의 확보에 역량을 모으고 있다. 기술탈취 위협이 늘면서 해외 주요국은 기술탈취 문제에 대응해 특허·영업비밀 등 기술보호 대표 수단의 정비와 함께 개별국 환경에 특화된 보호 제도를 도입·운영 중이다.
디스커버리 제도를 기반으로 특허·영업비밀을 강력하게 보호하는 미국은 지난해 반도체 과학법 등으로 경쟁국을 견제하는 한편 올해 ‘혁신기술 기동타격단’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은 일찌감치 기술유출 피해에 대응하고 있다. 2016년 유럽 영업비밀 통합지침을 마련한 후 올해 통합특허법원(UPC)을 출범했다. 프랑스식 전문가 사실조사의 유럽 전역 확대 적용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2019년 특허침해소송에 사증제도 도입, 2021년 경제안전보장담당실 설치 및 비밀특허제도 도입 추진 등 자국기술 보호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중국도 징벌적 손해배상을 강화하는 한편 특허소송에 공무원에 의한 현장증거조사 제도를 도입해 특허·영업비밀 보호 강화에 나서고 있다. 대만의 경우 2022년 국가안전법을 개정해 기술유출 범죄를 간첩 행위로 처벌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치와 제조업·수출 중심의 산업구조 등 기술패권 경쟁에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어 기술보호에 특화된 법·제도의 정비 등 대응이 시급하다.
특허청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또는 해외로 영업비밀이 유출되는 피해는 퇴직자에 의한 유출이 절반(51.2%)이고, 재직자에 의한 유출도 26.4%에 달하고 있다. 영업비밀 유출의 대부분은 외부인(24%)이 아닌 내부인인 셈이다.
기술유출 시도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기술유출로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비해 지나치게 약한 ‘솜방망이’ 처벌이 이뤄지면서 기술유출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허청이 2017~2019년 영업비밀 사건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영업비밀 침해범죄에 대한 유죄판결(자유형) 중 98%가 2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았다. 집행유예율은 75.3%(1심 기준)에 이른다. 영업비밀 유출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게 약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이다.
기술유출에 대한 처벌강화 필요성은 과거부터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특허청은 2019년에 이미 영업비밀 침해죄의 법정형을 국내유출 최대 10년, 해외유출 최대 15년으로 강화한 바 있다.
올해 추진하는 ‘부정경쟁방지법’ 일명 기술탈취방지법에서는 영업비밀 침해품에 대한 몰수·추징 규정을 신설해 처벌을 보다 강화하는 한편 제조시설에 대해서도 해당 법규를 적용해 2차 피해를 방지한다는 복안이다. 기술유출을 국내 단계에서 억제하기 위해 종전에 지나치게 낮게 설정된 국내유출 벌금형을 현행 5억원 이하에서 10억원 이하까지 2배로 강화한다.
특허청은 영업비밀 침해를 알선하는 행위도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 침해행위의 한 유형으로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인력을 통한 기술유출은 통상 경쟁사에 의한 조직적인 범죄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특허청은 조직적인 영업비밀 유출 시도를 억제하기 위해 법인에 대해서는 자연인의 3배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할 계획이다.
특허청은 반도체 분야 핵심 연구인력의 해외 이직을 방지하는 동시에 신속·정확한 특허심사를 제공하기 위해 올해 반도체 민간 전문가를 특허심사관으로 채용해 세계 최초로 반도체 전담 심사조직을 출범시켰다.
◆한국형 증거수집제도 도입 필요
기술을 보호하는 글로벌 표준 제도인 특허제도를 강화해 기술탈취로부터 정당한 권리자의 보호를 강화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우리나라는 인구 10만명당 특허 출원 건수가 전 세계 2위인 특허강국이다. 그러나 정작 특허권을 이용한 권리행사는 매우 어려운 국가로 통하고 있다. 2020년 1심 기준으로 10명 중 1명도 못 이기는 실정이다. 특허와 영업비밀 소송의 승소율은 7.5~7.7% 수준으로, 일반 민사소송(54.8%) 대비 턱없이 낮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굵직한 기술유출 소송은 원정소송으로 치러진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에서 제기된 우리 기업 간 소송만 12건에 이른다. 지난해 6월 유럽 통합특허법원이 출범하며 이제는 미국을 넘어 유럽까지 우리 기업의 원정소송이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원정소송이 벌어지는 원인으로 주요국에서 운영 중인 증거수집제도를 지목한다. 특허권자 보호가 강하다고 알려진 미국의 경우 당사자 간 증거를 폭넓게 교환토록 하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권리자 보호에 큰 역할을 하고 있고, 우리나라와 같은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대륙법계 국가는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현장에서 증거를 조사하는 법원 중심의 ‘증거수집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법원이 침해자(피고)에게 자료제출을 명령할 수 있는 제도 정도만 운영하고 있어, 명령을 받은 당사자가 자료의 소지를 부인하거나, 인멸·훼손·허위제출할 경우 이를 확인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실제로 지난 9월 중기중앙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특허를 보유한 중소기업이 기술탈취 피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애로사항으로 ‘피해사실 입증 어려움’을 가장 많이(78.6%) 응답했다.
특허청은 영업비밀 범죄 신고 활성화를 위해 영업비밀 해외유출 신고 시 포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법적근거 마련에 들어갔다. 현재 부정경쟁방지법상에는 위조상품에 대한 신고 포상금 제도만 근거 규정이 마련돼 있는데 기술유출 범죄의 중요도를 생각할 때 영업비밀 해외유출에 대한 신고 활성화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허청은 특허심사·심판이라는 고도의 기술전문성을 요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정원 1800여명 중 절반인 900여명이 박사학위 및 전문자격 보유자로 구성돼 있는데 부처 간 공조를 통해 이러한 기술전문성을 최대한 활용할 경우 해외로의 기술탈취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응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기술탈취 분쟁 시 신속한 피해구제를 위해 원스톱 해결체계를 구축한다. 이를 위해 특허청의 행정조사, 분쟁조정, 기술경찰 수사 간의 연계 및 기능을 강화한다. 원스톱 분쟁 해결체계를 위해 ‘산업재산 분쟁 해결 종합지원센터’를 설치해 분쟁조정, 행정조사, 기술경찰 수사를 종합적으로 관리·지원한다. 중장기적으로 ‘산업재산 분쟁조정법(가칭)’을 제정해 ‘산업재산 분쟁조정원’ 설립 방안까지 검토할 예정이다.
대전=강은선 기자 groov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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