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선의 풀무질] 용산에 용이 없다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청룡의 해가 밝았다. 대한민국에는 용 관련 지명이 총 1261개다. 그중에 서울시 용산구가 가장 유명하다. 용이 한강에 뛰어드는 형상이라 용산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로 가지 않고 용산으로 오면서 행정의 중심이 되었다. 지리적으로도 수도 서울의 한가운데다. 과거 용산은 한강 뱃길의 요지였다. 경기만은 조차가 커서 20㎞ 떨어진 용산까지 밀물이 들어왔다. 노를 젓지 않고도 배가 들어올 수 있었다. 용산부터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힘이 들었다.
그래서 군사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병참기지였고, 임오군란 때 청군이 주둔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미군이 머물렀다. 용산은 제국의 점령지다. 중국, 일본, 미국이 연달아 140년 넘게 지배하고 있다. 현재 용산 미군기지는 총 234만㎡(약 74만평) 중 76만㎡가 반환됐다. 나머지는 여전히 미국령이다. 대한민국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용산공원 부지로 추가 편입된 옛 방위사업청, 군인아파트, 전쟁기념관 등까지 합치면 총 300만㎡(약 90만평)에 달하는 상흔이다.
돌려받은 땅도 토양오염이 심각하여 섣불리 개방하지 못한다. 1급 발암물질인 다이옥신이 검출되었으며 지하수에서는 벤젠이 기준치의 1423배를 초과했다. 미군기지에서 흔히 발생하는 기름 유출 사고 때문이다. 불평등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으로 인해 환경오염에 대한 책임을 미국에 물을 수도 없다. 오염 정화를 위한 비용 문제로 반환 협상이 계속 늦어지고 있다. 원래는 2027년 용산공원 개장이 목표였으나 지금은 사실상 무기한 연기되었다.
나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동두천 캠프 케이시에서 카투사 작전병으로 복무하고 전역 후 용산구 해방촌에 살고 있다. 카투사 시절에는 용산 기지를 자주 드나들었다. 휴가 때면 미군 버스를 타고 용산에 내려서 부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문 앞이 바로 해방촌이었다. 드넓은 잔디밭과 호텔과 장교 숙소가 있는 기지를 뒤로하고 달동네에 들어서면 기분이 참 묘했다.
2024년 해방촌은 더는 달동네가 아니다. 신흥로 주변 상가 건물은 평당 1억원을 호가한다. 방송인 노홍철씨가 2016년 신흥시장 건물을 매입하여 책방을 개업한 뒤 시세가 급등했다. 노씨는 2018년 해당 건물을 매도하고 해방촌을 떠났으나 젠트리피케이션은 현재 진행형이다. 옆동네 경리단길보다는 그래도 낫다. 전국의 수많은 ‘○리단길’의 원조인 경리단길은 관광객이 몰리고 건물주가 임대료를 크게 올리면서 상권이 몰락했다. 반면 해방촌은 주민 수요, 즉 마을의 내수 경제가 비교적 단단하여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
해방촌은 다문화 예술마을이다. 이주민이 모여 살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이를 선호하는 청년 예술가가 몰린다. 한국에서 이민자, 소수자 등 아웃사이더가 편견 없이 어울리기에 제일 좋은 곳이다. 사실 해방촌뿐만 아니라 이태원 전체가 그렇다. 나는 우리 마을 입구에 굳게 닫힌 미군기지 대문을 볼 때마다 슬프다. ‘저 안에 그리 넓고 푸르른 땅이 있는데. 왜 우리가 이 좁은 골목, 잿빛 건물에서 놀아야 할까? 용산공원이 열려 있었어도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을까? 언제쯤 흉측한 담벼락과 철조망이 허물어질까? 저 문을 여는 것이야말로 개벽(開闢) 아닐런가?’
미합중국 육군에 증강된 카투사로서는 자유롭게 드나들었으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갈 수 없는 곳. 용산 미군기지는 빼앗긴 주권이다. 원래 용은 봉황과 함께 조선 왕의 상징이었다. 지금 대통령은 봉황을 상징으로 쓴다. 이제 대통령이 용산에 왔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용산에 다시 용을 모셔야 한다. 제국주의 총칼에 상처 입고 쫓겨난 용왕님이 제자리로 돌아오실 때다.
대한민국은 이제 엄연한 선진국이다. 경제, 기술, 문화, 예술, 무엇 하나 뒤처지는 게 없다. 그런데 딱 하나, 아직 온전한 주권국이 아니다. 용산에 용왕님이 안 계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삶의 주인이 아니다. 용산공원을 깨끗하고 안전하게 국민에게 돌려달라. 그것이 윤 대통령께서 강조하시는 “글로벌 스탠더드” 아닐까? 나는 우리 마을 해방촌 앞 90만평 마당에서 하루빨리 뛰놀고 싶다. 청룡의 해를 맞아 마당 건너 봉황님께 간곡히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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