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나면 뛰어내릴판"… 아파트공화국 재난 속수무책
20년 이상 아파트 560만호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 없고
완강기·소화기 구비도 부족
"소방설비 보완 대책 시급"
주민 대피교육도 동반해야
소화전 앞은 짐에 막히고
소방차 진입도 어려워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비율이 53.6%에 이른다. 국민 절반 이상이 집단거주시설에 사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이 중 560만가구는 준공 20년 이상 된 노후 아파트다. 여러 문제가 있지만 화재 등 안전사고가 나면 대형 사고로 비화할 위험이 상존한다.
최근 아파트 화재가 빈발하면서 이 같은 공포심에 불을 댕기고 있다. 지난달 25일 서울 도봉구 아파트 화재로 2명이 숨졌고 이달 2일엔 경기 군포시 아파트에서 불이 나 1명이 사망했다. 그사이에 서울, 인천, 수원 등에서 인명 피해로 이어지지 않은 몇몇 사고가 있었다. 이들 화재에는 공통점이 있다. 준공 20년 이상 된 노후 아파트로 소방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일경제 취재진은 서울·경기 지역의 준공 20년 이상 된 노후 아파트 5곳을 찾아 소방시설을 살펴봤다. 예상대로 스프링클러와 완강기는 없었고, 소화기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곳이 많았다.
경기 고양시 행신동은 아파트 단지가 밀집된 지역이다. 이곳 A아파트는 1995년 준공돼 총 662가구가 살고 있다. 이곳에는 스프링클러도, 복도마다 있어야 할 소화기도 없었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소화기는 가구마다 개별 구비해야 한다"고 전했다.
1994년 준공돼 330가구가 살고 있는 B아파트에도 스프링클러는 없었다. 취재진이 찾았을 때 마침 화재경보기가 오작동해 관리사무소 직원이 진땀을 빼고 있었다. 직원은 "습도가 높으면 아무 때나 경보기가 울려 애를 먹고 있다"고 토로했다.
서울 구로구의 17층짜리 C아파트(1997년 준공)는 12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직선 거리로 30m 앞에 주유소가 있어 화재 시 대형 사고로 번질 위험이 있었다. 아파트 안내게시판에는 '아파트 내 흡연 금지' '담배꽁초 아무 데나 버리지 말 것' 등 화재 관련 경고문이 다수 붙어 있었다.
각 층 엘리베이터 앞 현관과 복도에 완강기와 스프링클러는 설치돼 있지 않았다. 소화기는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복도에는 소화전이 있는 곳도 없는 곳도 있었다. 화재 발생 시 주민들이 대피할 수 있는 옥상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문 앞에는 '물탱크 관리 위해 평상시에는 잠금 상태로 관리하니 비상시 17층에서 열쇠를 받으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서울 노원구의 D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짜리로, 340가구(1995년 준공)가 살고 있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소화기를 가구별로 하나씩 나눠주고 있다"고 말했다. 취재진이 직접 내부를 돌아보니 완강기는 전 층에 없었고 대피할 수 있는 옥상이 없는 곳도 있었다. 그런 곳에는 '이곳은 대피 공간이 없는 옥상입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있었다.
서울 성동구의 E아파트는 21층짜리로 246가구(1994년 준공)가 살고 있다. 스프링클러는 16층 이상에만 설치돼 있고, 그 아래층에는 설치돼 있지 않았다. 완강기는 전 층에 없었다. 방화문 앞뒤로 주민들이 자전거와 개인 물품 등을 잔뜩 쌓아두고 있어 비상시 계단으로 대피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2017년부터 6층 이상 모든 건물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의무화했지만, 기존 건물에 대한 소급(遡及) 적용은 어렵다.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려면 가구별 배관·헤드 설치 가능 여부뿐만 아니라 물탱크 설치가 가능한지 건물 구조체 안정성 등을 확인해야 하는데 노후 아파트에서 이 같은 작업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영주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소화기·화재감지장치 등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주민 대피 훈련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노후 아파트는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어 주민들이 비용을 들여 스프링클러 등을 설치하는 것을 꺼릴 수 있다.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요건을 완화해 현행 소방법을 따르도록 계기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최영상 대구보건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노후 아파트의 자동화재탐지 설비는 수명이 다했을 수 있고, 소화기도 정상 작동이 안 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꾸준한 점검이 필수"라고 제언했다.
[권선미 기자 / 박동환 기자 / 진영화 기자 / 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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