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의 창]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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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삼아 나간 산책길에서 작은 사찰에 들렀다.
대웅전 처마 끝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입을 달싹거린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물고기의 무심한 눈과 딱 마주친다.
흔들면 소리가 나도록 방울 속에 넣는 단단한 물건을 탁설이라고 하는데 거의가 물고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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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위로하고 다독이는 듯
난 어떤 소리 내며 살았나
새해엔 저마다 풍경을 품고
건네는 말 속에 온기 담길
운동 삼아 나간 산책길에서 작은 사찰에 들렀다. 대웅전 처마 끝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입을 달싹거린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물고기의 무심한 눈과 딱 마주친다. 물고기는 방문객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고 싶은 걸까?
절 하면 떠오르는 청각적 이미지는 목탁 소리, 불경 소리, 범종 소리가 있다. 나에게 으뜸은 풍경 소리다. 추녀 끝에 달랑거리는 물고기는 맑은 음색으로 노래하는 메조소프라노 가수를 닮았다. 쇠와 쇠가 부딪혀 내는 청아한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지면 새들은 풍경 소리를 부리에 물고 우편배달부처럼 사방팔방으로 전하러 간다. 풍경은 일 년이면 세 번의 변성기를 겪는다.
봄의 풍경 소리는 봄보다 먼저 봄 소식을 알리는 싱그러운 사춘기 소녀의 재잘거림이다. 풍경 소리가 울려 퍼지면 절에도 봄이 번진다. 여름의 풍경 소리는 더위를 잠잠하게 해주는 소나기다. 한낮의 열기를 진정시키고 땀을 닦아주는 청량함을 전파한다. 가을의 풍경 소리는 사랑에 빠진 연인의 밀어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밑자락을 깔아준다. 겨울의 풍경 소리는 포르테다. 꽁꽁 언 세상을 소리로 녹여낼 듯이 힘차서 화두를 붙들고 동안거에 정진하는 사미승을 연상시킨다.
사계절 변신을 하지만 바람이 내는 염불 소리는 늘 평안하고 운치 있고 여백의 미를 지녔다. 자동차 경적이나 굴착기와 광고 등 도시의 복잡하고 시끄러운 소리들과는 결이 다르다. 대다수 풍경은 범종의 모양을 본떴다. 흔들면 소리가 나도록 방울 속에 넣는 단단한 물건을 탁설이라고 하는데 거의가 물고기 모양이다.
최초로 풍경을 만들어 절에 걸어둔 이는 누구였을까? 아마도 그는 불심 깊은 대장장이였으리라. 지금처럼 공장에서 뚝딱 만들어내는 시절이 아니었으니 풍경 하나를 위해 공들인 시간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불에 달군 쇳조각을 쇠망치로 두들기고 다시 차가운 물에 담그는 풀무질을 수도 없이 반복하고서 더 이상 흠을 찾아볼 수 없었을 때 삼가는 마음으로 세상에 내놓던 작품이었을 것이다. 풍경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쇠로 만든 죽비였다. 대장장이는 절에 가서 풍경을 볼 때마다 불자들의 견성에 작은 힘을 보탰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행복해했겠지. 그의 손을 거친 쇳조각은 물고기가 되어 소리를 빚는 존재로 되살아났다.
나는 어떤 소리를 내며 살았을까? 당시에는 꼭 필요했다 여긴 말들도 돌아보면 쓸데없는 잔소리일 때가 많았다. 자신의 결정이 옳다고 생각해 남들을 몰아붙이기도 했다. 이제껏 소음을 전파했다면 앞으로는 부족한 듯 말하고 싶다. 타인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풍경 소리가 되려면 하고 싶은 말도 보약처럼 꿀꺽 삼켜야 하리라.
정호승은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라고 노래했다. 시인의 표현처럼 2024년에는 우리도 저마다 풍경을 달고 살면 좋겠다. 거칠고 뾰족한 소리가 나오려 할 때 지긋이 한 박자 눌러주고, 급한 성정이 요동칠 때 잔잔히 달랠 수 있는 풍경처럼 살길 바란다. 서로가 건네는 말 속에서 풍경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지금보다 온기가 느껴지는 세상이 될 것 같다.
겨울바람은 풍경을 타고 놀다가 행자가 벗어놓은 고무신에 펄썩 뛰어내린다. 허공을 맴도는 물고기가 내게 눈을 찡긋하며, 넘치는 혈기는 벗어두고 모자람과 비어짐의 여운으로 갈아입으라고 속삭인다. 햇살 비껴간 툇마루에 걸터앉은 풍경 소리가 발 장난을 한다. 나는 풍경 소리를 살며시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겨울이 빚은 염불 소리와 함께 일주문을 넘는다.
[김정랑 시인·제1회 만추문예 시부문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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