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시대, 그래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 [아침햇발]
이봉현│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모진 시대다. 두 개의 전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복귀가 점쳐지는 국제정세는 혼돈 그 자체다. 세계 곳곳에서 증오와 배제의 정치가 득세한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급기야 야당 대표가 칼로 테러를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난해 말 타계한 국제정치학의 거물 헨리 키신저는 지금 세계가 “전형적으로 1차 세계대전 직전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벨에포크’(아름다운 시절)라 불리던 날들은 1910년대 들어 마감했다. 유럽 열강의 세력균형이 흐트러졌고, 한 세대에 걸쳐 전쟁과 혁명, 갈등과 폭력이 국제 및 국내 정치 무대를 휩쓸었다. 그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수천만명이 생목숨을 잃었다. 이 시기에 인생의 후반부를 보낸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젊었을 때만 해도 빅토리아 시대의 낙관주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자유와 번영이 질서정연하게 세계로 퍼져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나빠졌고, 확고해 보였던 과거의 성취들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한 거로 판명됐다”고 회고했다.
러셀의 시대가 그랬듯, 당연하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뒷걸음치는 요즘이다. 마음을 후벼 파는 날 선 말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억지가 상식과 공존의 토대에 놓인 공동체의 발밑을 허문다. 경제적 결핍도 힘겹지만, 각자도생 사회에 홀로 던져진 듯한 고립감이 뼈저리다. 그날그날을 버텨내는 사람들의 마음은 ‘소금밭’이다.
다행히 아직 세상이 잿빛만은 아니다. 불신의 안경을 잠시 벗으면, 말없이 희망이 되는 우리 이웃을 만날 수 있다. 이 사회가 왜 아직 버티고 있는지 말해주는 사람들이다. 강원도 원주의 한 무인 상점에서 지난달 키오스크 결제가 안 되자 한 남성이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달아났다. 잠시 뒤 문 밖까지 흐트러진 물건을 차근차근 주워 정리하고, 주인에게 전화해 상황을 알려주기까지 한 뒷손님이 있었다. 큰비가 오던 8월의 어느 날, 비를 맞으며 폐지 수레를 미는 노인에게 어깨가 다 젖으면서 1㎞ 가까이 우산을 씌워주고 현금까지 뽑아 건넨 여성도 있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인터뷰도 사양했다.
장기기증으로 생명을 나눠준 이와 그 어려운 결단을 함께한 유가족도 많다. ‘별 보기를 좋아했던 15살 소녀’, ‘이웃에 약초 나누던 59살 아빠’, ‘짜장면 봉사하던 43살 헬스트레이너’ 같은 이들이 2~7명을 절망에서 구한 뒤 별이 됐다. 도움받은 걸 잊지 않고 남에게 베푼 사람도 많다. 안동의 85살 할머니는 “남에 옷 만날 어더(얻어) 입고 살아 완는대(왔는데), (…) 나도 이재 인생길 마주막에 조훈 일 한번 하는 개 원이라”는 서툰 손편지와 함께 빈 병 모아 만든 30만원을 맡겼다. 밤에 조깅을 하다 한 여학생이 50대 남자에게 난폭하게 얻어맞는 것을 보고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구해낸 대학교수, 고속도로변에서 불타는 자동차를 지나치지 않고 내려 진화를 도운 장병 등 수많은 헌신의 사연이 있다. 앞선 원주의 무인 상점 주인이 “딱 보면 나쁜 것만 보이지만, 결국에는 착한 사람들도 있고 해서 세상이 이렇게 균형이 맞아서 돌아가는 거”라고 한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힘들어도 위로가 있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위안을 갈구하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이런 뉴스를 독자가 찾아 읽는다. 한겨레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따뜻한 이웃의 이야기를 꾸준히 보도하고 있다. 그 기사들은 누리집의 ‘덕분에, 더 따뜻한 세상’ 코너에 갈무리되어 있다. 담당 기자는 “권력감시·사회비판 기사가 저널리즘의 본령인 것처럼 훈련받아온 것과 달리, 독자들께서는 훈훈한 소식에 많이 목말라하시는구나 느끼고 있는 요즘”이라며 “미담의 힘을 새삼 느끼고 있다”고 한다.
선의는 선의를, 악의는 악의를 낳는다. 이웃의 듬직한 행동에 위로를 얻으면 나 역시 다른 이의 희망이 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래서 언론이 비판 못지않게 훈훈한 뉴스 발굴에 힘썼으면 좋겠다. 똑같은 열정으로 우리는 악의에 맞서야겠다. 오십보백보일지라도 증오에 더 기대는 정치세력을 선거에서 표로 응징해야 한다. 누군가 인터넷에서 조리돌림 당할 때, 난무하는 혐오의 댓글 속에 “당신이 한 만큼만 책임지면 돼, 그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야”라고 한 줄 남기는 마음씀이 소중하다. 이렇게 내미는 손으로 희망의 홀씨가 퍼지고, 서로 등을 기대는 든든함으로 우리 함께 이 모진 시대를 건널 수 있지 않을까?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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