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어이없다’는 대통령이 어이없다
일본 도쿄 한복판인 지요다구 가스미가세키에는 ‘영토·주권 전시관’이 있다. 독도, 센카쿠열도, 쿠릴 4개 섬이 자국 영토라고 선전하기 위해 아베 신조 정권 때인 2020년 1월 확장·재개관했다. 당시 기자는 개관 첫날 그곳을 찾았다. 전시관은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억지로 가득했다. 독도를 자기 땅으로 표시한 일본 지도가 걸려 있고, 독도관 입구에는 ‘1953년부터 한국의 불법 점거’라고 써 있었다. 일본 정부가 독도는 일본 판도가 아니라고 밝힌 ‘태정관 지령’(1877년) 등은 찾아볼 수 없었다. 60대 일본 남성은 “한국은 반성하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로부터 4년 후, 윤석열 정부의 행태에 비슷한 심정을 느끼게 될 줄 몰랐다. 국방부가 발간한 장병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에 독도를 일본과 영토분쟁 중인 지역으로 기술했기 때문이다. 독도를 국제 분쟁지역으로 만들려는 일본에 먹잇감을 던져준 셈이다.
교재에 수록된 한반도 지도에 하나같이 독도가 빠졌고, 양국 간 영토·역사 문제 언급도 없는 걸 보면 교재 제작에 특정 의도가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한·일 간에 과거사, 독도 영유권 분쟁이 있는 건 사실” 등 편향된 인식을 보여왔다. SBS 보도를 보면 교재 제작 과정에서 대통령실 안보실장 주재 범정부 회의가 수차례 열렸고, 교재를 활용해 일반 국민 대상 안보교육을 실시하는 방안도 논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 정신교육을 논하기 전에 공직자들의 나사 빠진 정신부터 고쳐야 한다.
신 장관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이번 일에 “어이없어했다”고 한다. 앞서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크게 질책했다고 전했다. 매사 이런 식이다. 만 5세 입학과 주 69시간제, 수능 킬러 문항 배제 등 정부가 설익은 정책을 내놨다가 혼란을 야기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알려진 대통령 반응은 화내거나 질책하거나 어이없어하는 것이다. 국정 최고책임자라면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이번 사태는 ‘갑툭튀’가 아니다. 윤 대통령은 강제동원 배상 문제를 졸속 봉합했고,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적극적인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는 등 일본을 두둔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성의 있는 호응’은커녕 “한국 반성하라”는 적반하장을 보이고 있다. 급기야 일본 기상청은 지난 1일 이시카와현 인근에 강진이 발생하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기하고 쓰나미 주의보를 발령했다. 영토·역사 문제처럼 민감한 현안은 덮은 채 일방적인 한·일관계 개선에 매달려온 후과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윤석열 정부가 벌이고 있는 뉴라이트 이념전과 떼서 생각할 수 없다. 윤석열 정부는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사를 지우고, 친일 전력이 있는 백선엽 장군의 재평가를 추진하고 있다. 뉴라이트는 일제 식민통치의 불법·강제성을 부정하고 식민통치가 한국을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는 역사수정주의를 내세운 일본 극우보수들의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윤 대통령이 뉴라이트에 포섭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은 과거 친일파 미화 국정교과서 추진으로 논란이 됐고, 김성회 전 대통령실 종교다문화비서관은 위안부 피해자를 ‘화대’ 운운하면서 비하했다. 따지고 보면 일본의 독도 국제 분쟁화 시도에 빌미를 준 건 이명박 정부였다. 지지율 회복이 급했던 이 전 대통령은 2016년 독도 방문이라는 무리수를 뒀다. 윤석열 정부의 한 축은 이명박 정부 출신들로, 일부는 뉴라이트이다.
결국 이번 사태의 저변에는 윤석열 정부의 편향적인 대일 외교, 뉴라이트적 인식과 이념전 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이런 기조가 정부 내에 퍼져나갔을 것이고, 과거 이 칼럼에서 지적한 일본식 ‘손타쿠’(忖度·윗사람이 원하는 대로 알아서 행동)가 자연스럽게 가동됐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정부”를 강조했다. 지난 2년간 윤 대통령이 건드려서 문제를 키운 게 얼마였는지 되돌아보라. 윤 대통령은 “패거리 카르텔 타파”를 또 얘기했다. 낮은 지지율에도 아랑곳 않고 ‘어퍼컷 세리머니’를 연발하던 독선과 오만을 성찰하긴 한 걸까.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물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고 쓰인 명패를 대통령실에 뒀다고 한다. 이럴 거면 명패를 치워라.
윤 대통령의 검찰 후배이자 부하였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우리는 우리 할 일 잘하면 되고, 대통령은 대통령이 할 일을 잘하면 된다”고 했다. 그 말 그대로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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