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함께 흐른 ‘교토의 숨결’ 가모가와 강
[서울&]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고대의 작은 시내 ‘세미’에서 출발
교토 건설 때 물줄기 튼 ‘인공적’ 하천
도심 흐르는 자연공원으로 시민 사랑
정지용 시 ‘압천’으로 우리에게도 친숙
기야마치·산조대교 일대, 관광객 북적
폰토초거리, 지금도 게이샤 게다 소리
강변촌 ‘가모가와라’, 전통예술 탄생지
피차별 해방운동 등 ‘민중광장’ 역할도
교토에는 가모가와(鴨川) 강이 흐른다. 한강처럼 큰 강은 아니지만 교토의 “산 좋고 물 맑은” 자연을 대표하는 강이다. 고대에는 ‘세미’(瀨見. 우리말 샘 혹은 샘물과 관계있을 것이다)라는 이름의 작은 시내였다는 강은 1200여년 전 사람들이 물줄기를 틀면서 교토의 역사에 등장했다. 본래 자연하천이지만, 794년 교토가 계획도시로 세워질 당시 도성 내 범람을 막기 위해 하천 공사를 벌여 물흐름을 바꿨다는 학설이 있다. 그때의 건축물은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인공’의 강만은 자연이 되어 교토의 숱한 인간사를 지켜보며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가모가와는 교토 동쪽을 병풍처럼 두른 히가시야마(東山) 산 36연봉과 더불어 교토에 ‘산자수명처’(山紫水明處, 산빛이 곱고 강물이 맑은 곳)라는 명성을 안길 만큼 풍경이 아름답다. 벚꽃과 단풍이 강을 물들이는 봄가을, 강폭이 좁고 수심이 얕아 물고기잡이와 아이들 물놀이터가 되어주는 여름철까지 오늘날 교토시민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산책길이다. 한국사람에게는 ‘압천(鴨川) 십릿벌에/ 해는 저믈어…저믈어…/ 날이 날마다 임 보내기/ 목이 잠겼다… 여울 물소리…’로 시작되는 정지용의 1924년 작 시 ‘경도 압천’(京都 鴨川)으로도 친숙하다.
가모가와 강 서쪽에는 강을 따라 10㎞ 정도를 나란히 흘렀던 운하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다카세가와(高瀨川)운하는 지금은 수운(水運) 기능을 다했지만, 근대 초까지 교토 경제의 부흥을 이끈 견인차 노릇을 했다. 잔뜩 물건을 싣고 오사카를 오가는 예인선(다카세부네)의 성업으로 화물주는 물론 상인과 관리, 일꾼과 여행객을 상대로 한 여관, 술집이 밀집하면서 운하 일대는 교토 최고의 유흥가가 됐다. 오늘날에도 이 일대는 여전히 교토 여행객들의 ‘밤의 1번지’이다.
“역사는 흐른다”라는 말을 실감하며 가모가와 강변을 걸어본다. 자연이 있고, 사람이 있고, (히)스토리가 있는 산책이다. 가모가와 강의 북쪽 기점이라고 할 시모가모 신사 삼각주에서 출발한다.
가모대교 위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왼쪽에서 가모가와(賀茂川), 오른쪽에서 다카노가와(高野川)가 흘러와 합쳐진다. 이곳부터 이 강을 가모가와(鴨川)라 부른다. 특이한 점은 상류의 가모가와(賀茂川)와 합쳐진 뒤의 가모가와(鴨川)가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는 점이다. 왜 같은 가모가와를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가 일본인의 정답이다.
여하튼 이곳 삼각주에는 고대 신화를 간직한 시모가모신사와 여름철 중고 책 시장이 열리는 다다스노모리 숲이 있어 시민들의 쉼터가 되어준다.
가모가와에는 도시부에 13개의 다리가 걸려 있다. 북쪽 가모대교에서 남쪽 시오고지 다리까지 약 5㎞에 가까운 강변공원이 이어진다. 다리를 기준으로 보면 2조대교에서 5조대교 사이의 강 서안이 가장 번화한 길과 만난다. 3조와 5조 다리는 근세 교토의 실질적인 건설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 생긴 것이고, 4조는 마치슈들이 자신들의 경제력으로 건설한 ‘민간자본’의 다리가 시초였다.
기야마치(木屋町)는 다카세가와운하 주변을 따라 형성된 유흥가이다. 먹고 마시고 노는 집이 죄다 모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물이 모이고 흩어지는 선착장 동네였던 만큼 목재, 간장, 쌀, 술 등의 ‘돈야’(問屋·전문도매상)와 창고, 전당포들이 즐비했고, 정기적으로 교토를 오가야 하는 지방 영주들의 집도 들어섰다. 시장 속에 숨는다는 말이 있듯이 온갖 사람이 오가는 기야마치 일대는 막부 말기에는 유신 지사와 낭인 사무라이의 은신처이자 활개장이었다. 사카모토 료마, 가쓰라 고지로 같은 ‘걸물’들의 사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기야마치의 여러 명소 가운데 관광객과 교토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아마 폰토초(先斗町)일 것이다. 3조와 4조에 걸쳐서 강과 운하 사이에 들어선 하나마치(花街, 환락가)였는데, 지금도 수많은 술집과 음식점들이 좁은 골목에 코를 맞대고 있다. 게이샤(기생)가 나오는 고급요정도 있어서, 딸각딸각 게다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게이기(藝妓·예기)나 마이코(舞妓·무기)의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
한자로 선두(先斗)라고 쓰고 ‘폰토’라고 읽는 희한한 지명은 선단(先端)을 뜻하는 스페인어 ‘punto’가 본래 의미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선교사를 통해 유럽 문물과 접촉을 시작한 일본 풍속사의 한 조각이다.
강변식당 ‘노료유카’(納凉床)는 교토의 여름 명물이다. 다리를 높이 받쳐 강 쪽으로 돌출시킨 옥외 마루(유카) 위에서 강변 풍경을 즐기며 식사할 수 있도록 한 식당이다. 가족과 연인들이 노료유카를 향해 강변을 걸어가는 야경은 교토를 상징하는 수많은 표현물에 단골로 등장한다. 보통 5월에서 10월 말까지 문을 여는데 2023년 현재 87곳의 가게가 영업 중이라고 한다. 강가에 걸상이나 탁자를 놓고 음식과 술을 파는 노천주점 가와도코(川床)의 일종인 노료유카는 17세기부터 형성됐다고 하는데, 홍수와 태평양전쟁 등으로 한때 철폐됐다가 1950년대부터 영업이 재개됐다고 한다. 야간영업은 2000년부터이다.
이 밖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산조대교는 일본 근세 목조다리 건축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가모가와 강변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좋은 포토존이다. 구리를 씌운 난간 장식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칼자국은 격동의 혁명기에 쫓고 쫓기던 사무라이들의 운명을 보는 듯하다.
가모가와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민중의 광장’ 가와라(河原. 강변의 모래톱 지대. 빈민, 기층노동자, 피차별 부라쿠민 등이 모여 살았다)이다. 절과 신사에 예속돼 노역을 제공하며 이곳에 모여 살던 천민노동자들은 ‘가와라모노’(河原者)라 불리며 천대받았지만, 이 ‘가와라 것들’ 사이에서 일본 예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유수한 예인이 배출됐다. 특히 일본의 2대 전통예능이라고 하는 노가쿠(能樂)와 가부키(歌舞伎)는 가와라의 시바야(芝屋. 소극장 또는 가설무대)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막부를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로 옮겨가자 교토에는 묘한 해방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권력의 공백 지대에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가모가와라 일대 유흥가로 모여든 광대, 춤꾼, 노래패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창작의 기운이 넘쳐났다. 이들은 가와라 일대에 무대를 가설하고 “서푼짜리” 공연을 올렸다. 이들 연희꾼들 가운데서 노(能)의 대가가 나왔고, 동해 바닷가 이즈모에서 온 무녀 오쿠니(阿国)가 처음으로 가부키를 춘 곳도 이곳, 가모가와라였다. 오늘날에도 유명한 기온거리의 가부키극장 미나미자(南座)의 ‘가오미세’(새로 교체되는 배우가 얼굴을 소개하는 행사)는 오쿠니에 대한 후세의 오마주이다.
노가쿠의 대성자 제아미(世阿弥. 1363~1443)는 “34~35살 무렵까지 ‘천하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끝”이라고 후배, 제자들을 다그쳤다. 이때의 ‘천하 인정’은 쇼군 같은 권력자가 내려주는 ‘명인’ 칭호가 아니다. 제아미가 말한 ‘천하의 인정’은 가와라의 시바야에서 터져나오는 관객의 박수갈채 소리다. 일본 서민예술의 꽃은 이들 가와라의 예인들과 그들의 공연에 기꺼이 돈을 낸 교토 조닌(常人)들의 합작품이었다.
가모가와에는 왕조와 지배자의 역사만 흐른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민중의 역사도 흘렀다. 가와라모노뿐 아니라 피차별 부라쿠민들과, ‘숨은 혁명가’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꾼 곳이기도 했다. 훗날 교토가 피차별 해방운동의 중심이 되고, 근대 민권사상과 사회주의 운동의 온상이 된 것도 가모가와 강의 잊을 수 없는 역사이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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