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개로 조각난 풍경, 60개의 붓질과 감정···추상과 구상의 경계가 녹아드네
이광호는 2017년 뉴질랜드 남섬의 케플러 트랙을 따라 한 시간 정도 올라가다가 한 습지에 눈길을 사로잡힌다. 특별할 것 없는 습지였지만, 그 안엔 화가 이광호가 그리고 싶은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는 “수풀과 이끼가 뒤엉킨 부분, 수면에 비치는 하늘의 형상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들이 회화로 표현하기에 적합한 주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후로도 같은 곳을 수차례 방문한 이광호는 조그만 웅덩이 같은 습지의 사진을 아주 크게 확대해 그리기 시작했다. 한 점의 그림이 아니라 60개의 프레임으로 구획해 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루도록 했다. 전체이면서도 일부이며, 개별적이면서도 연결된 그림,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전혀 다른 습지의 풍경은 이렇게 탄생했다.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광호의 개인전 ‘블로업(Blow-up)’에선 전시장 큰 벽면 전체를 채운 59점의 습지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멀리서 보면 사실적 풍경화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구체적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힘든 추상화 같다. 60조각으로 나뉜 풍경에서 오른쪽 위의 한 점을 떼어내 텅 빈 벽이 드러난다. 떼어낸 작품의 풍경은 확대해 그려 반대편 벽에 걸었다.
“구상 회화에서 화가는 세계의 일부분을 구획해서 보여주게 됩니다. 구획을 통해서 주제나 내용이 담기는데, 이번 전시에선 풍경을 일괄적으로 구획해 화가의 의도를 배제한 상태에서 이미지를 다채롭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60개 그림들을 하나로 연결하려는 의도를 배제하고 한 개의 독립된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완성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지난달 14일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광호는 이같이 말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라는 질문이 사라진 자리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회화적 방법론이 채웠다. 이광호는 이번 전시를 ‘붓질 연구’라고 이름 붙인다. 그림 한 점 한 점을 가까이서 바라보면 휘몰아치듯 자유롭게 그어진 붓선, 물감을 긁어내 날카롭게 표현한 부분, 윤곽을 흐려 뭉근하게 표현한 부분 등 그림마다 기법을 달리했다. 붉은색과 하얀색의 이끼가 얽히고설킨 풍경에선 습지의 야생적 생명력이 느껴지고, 물웅덩이에 반사된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의 그림은 정적이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붓질을 위해선 바탕이 중요했다. 동대문시장에서 직접 천을 구해 그라운딩을 하며 캔버스를 손수 제작했다. “캔버스는 음식에 비유하자면 육수와 같은 역할을 해요. 육수에 따라 음식의 맛이 좌우되듯이 바탕면의 그라운딩이 달라지면서 붓질을 할 때 물감이 흡수되는 정도가 달라져요. 즉흥적인 상황이 연출되기도 해요. 물감의 흡수 정도에 따라 제가 화면에 반응하면서 그리게 되거든요. 그림 하나하나가 다른 호흡을 지닌다는 걸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밀랍에 안료를 섞은 후 불에 달구어 화면에 고착시키는 고대 이집트의 엔코스틱 기법으로 그린 그림들도 있다. 밀랍이 녹으면서 물감이 섞여들어 윤곽이 흐려지고 부드럽게 표현돼 다른 그림들과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이광호는 “윤곽 구분이 없어지면서 말이 사라지고 내 감정의 흔적들이 확인된다”고 말했다.
이광호는 화가의 ‘매너’에 대해 말했다. “매너는 타인에게 전수가 가능한 테크닉과 구분되는 화가의 지문, 고유한 회화적 흔적과 같습니다. 가수의 음색, 소설가의 문체와 같은 거죠. 화가가 자신의 고유한 붓질을 구사하느냐 아니냐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대표적 사실주의 화가로 불리는 이광호는 인물의 사실적 초상화 시리즈인 ‘인터-뷰’, 선인장의 다채롭고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그린 ‘선인장’, 제주 곶자왈의 풍경을 그린 ‘그림풍경’ 등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는 제주 곶자왈의 야생적 덤불을 그린 ‘그림풍경’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이를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풍경을 확대하고 조각내 세세한 표현에 집중함으로써 화가의 고유한 시선과 표현력이 극대화됐다. 다양한 생명이 움트는 생태계의 보고이자 야생의 이끼와 풀들이 거칠고도 자유롭게 자라는 습지는 가까이 다가가 확대해 그리기에 적합한 풍경이다. 휘몰아치는 붓선과 부드러운 윤곽, 붉은색·노란색·하얀색 이끼와 초록빛 풀, 물에 반사된 푸른빛 하늘이 그림 속에 서로 다른 개성을 드러내며 어우러진다.
전시 제목 ‘블로업’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블로업>(1966)에서 따왔다. 이광호는 “시선의 욕망이 갖고 있는 허망함,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의 메시지가 이번 전시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철저히 눈이 보는 바를 따라 그려온 이광호가 밀어붙인 시선의 극단에는 오히려 보이는 대상과 상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이 있었다. 이광호는 “이번 작품을 그리면서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단계 발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전시장엔 총 65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벽면을 가득 채운 59개의 그림 왼쪽 아래엔 작가가 몰래 숨겨놓듯 그린 꿩이 있다. 화려한 습지의 색감에 녹아들어 한눈에 알아보긴 어렵다. “심리적으로 힘들었을 때 꿩에 빗대어 저를 표현했어요. 꿩이 위급한 상황에서 덤불 속에 머리만 숨기는 모습이 바보같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그리기 시작했죠.” 이광호가 ‘자신의 아바타’라고 말하는 꿩을 찾는 것도 전시를 관람하는 재미 중 하나다. 28일까지. 무료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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