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혜 칼럼] 변방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한겨레 2024. 1. 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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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 우리의 국운이 용솟음치며 올라가기를 바란다면, 세계를 무대로 인류보편의 공통가치를 추구하는 선진국답게 살려면,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을 세계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지역이 곧 글로벌이란 의미로 글로컬이란 표현도 회자하고 있지만, 무늬만 글로벌은 곤란하다. 외지인을 주변인으로 만드는 지역적 폐쇄성을 탈피해야만 진짜 글로벌이 될 수 있다.

노정혜 |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아주 오래전 팔당호변의 정약용 선생 유적지를 방문했던 때의 기억이 내게는 아직도 충격으로 남아 있다. 1980년대 중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풋내기 조교수로서 내가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어떤 연구를 해야 하나 모색하던 시기였다. 다산 유적지에 있는 기념관에 실학자들의 사상과 업적에 대한 소개가 소박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유난히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땅은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을 소개하며, “그러니 더 이상 중국이 중심이라 할 수 없다. 변방과 중심의 구분이 없다. 우리도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의 표현이었다.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 젖어 있던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북경에서 접하게 된 서양의 과학문명을 실학으로 발전시키며, 과학에 근거한 관점의 전환을 보여주는 탁월한 예시였다. ‘조선시대’를 구습에 찌든 봉건사회의 동의어쯤으로 간주하던 그 당시의 나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깨달음이었다. 서양이 축적한 눈부신 과학 발전에 주눅이 든 상태에서, 어떻게든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의무감만 가지고 있던 ‘개화된’ 나에 비해,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물론 일부이지만) 과감히 중화사상과 결별하여 우리도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을 이미 200년 전에 설파했으니, 나의 사대주의적 사고가 철퇴를 맞는 경험이었다.

19세기 말, 조선(朝鮮)을 번역한 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로 외국에 알려지기 시작하던 변방의 우리나라는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어느 틈에 역동적인 한국(Dynamic Korea)으로 불리는 나라가 되었다. 경제와 교류 규모가 커지면서 지난 20년 동안 ‘국제화’로 표현되는 급격한 변화가 우리 사회에 일어났다. 국내 거주 외국인이 250만명을 넘어섰고, 올해에는 인구의 5%를 넘어가는 ‘다인종·다문화국가’가 된다. 초등생의 4.2%가 다문화가정 출신이고 그 비율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려는 외국인 유학생들도 꾸준히 늘어 13만명에 육박하며, 특히 대학원 과정에서는 현재 재적생의 15%에 이르는 약 5만명이 공부를 하고 있다. 케이(K)팝과 케이드라마의 매력도 일조하였겠지만, 전세계 글로벌대학의 순위를 매기는 큐에스(QS) 대학평가에 40여개 대학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도 외국인 유학생을 늘린 유인이었을 것이다. 2021년 유엔이 인정한 선진국 반열에도 올랐으니, 이제 더는 변방이라 할 수 없는 국제적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국제화가 많이 된 것 같은 우리나라가 과연 세계적 수준의 글로벌한 나라가 된 것은 맞나? 기피 분야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저임금 노동자, 부족한 등록금과 연구인력을 메우는 역할을 하는 유학생들 외에,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하게 활동할 수 있는 외국인 전문가들이 더 많이 들어와야 하는 것 아닌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기업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어 다행인데, 인재를 제공하고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야 하는 대학들은 과연 얼마나 글로벌한가. 지구상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경제 규모로, 지구와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국제적 연대로 풀어가고자 하는 주도력을 우리는 얼마큼 발휘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이 소속감을 느끼며 살 수 있는 포용성을 갖고 있는가. 외국에 나가서 성공한 한국인들에게는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우리나라를 선택한 외국인들에게는 여전히 배타적인 제도와 문화적 이중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다.

큐에스 대학평가에 꽤 많은 학교가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100위 안에는 5개, 500위 안에는 14개의 대학이 들어 있고, 대부분 힘겹게 그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연구력만 평가하는 또 다른 평가에서는 서울대도 129등에 그치며 500등 안의 5개 대학도 대부분 순위가 매년 하락하고 있다. 연구논문의 질적 우수성을 나타내는 논문당 인용횟수는 여전히 30위 밖에 머물고 있다. 영양가 없는 논문을 양산하여 개수만 늘리게 만드는 평가체계도 문제이고, 분야마다 풀어야 할 도전적 과제, 글로벌 어젠다를 다루지 못하는 것도 우리 대학의 연구력을 답보 또는 하락시키는 원인이다.

우리가 명실공히 국제화가 되기 위해서는 ‘나가는’ 방식과 ‘들어오는’ 방식의 국제화가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적은 선진사회 또는 한국에 대한 동경이 큰 개발도상 국가에서 활동하는 ‘나가는’ 방식의 국제화는,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하는 ‘들어오는’ 방식의 국제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 ‘나가는’ 국제화는 대부분 비용과 프로그램, 당사자의 의지가 갖추어지면 달성이 되는 반면, ‘들어오는’ 국제화는 거기에 더해 시스템과 문화가 받쳐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외국인 유학생이 8천명에서 13만명으로 늘어날 동안 외국인 전임교수는 1300명에서 4500명으로 늘었다. 그나마 10년 전 6천여명으로 정점을 찍었던 외국인 교수는 현재 10년간 계속 줄고 있다. 서울대도 지난 10년간 전체 교수의 5%인 100명 선을 어렵게 유지하고 있다. 그것도 외국 국적을 가진 동포들이 상당수 포함된 숫자다. 이 정도로는 진정한 국제화를 이룰 수 없다.

외국의 인재와 전문가를 유치하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는 급여 못지않게 정주를 위한 다각적인 지원이 중요하다. 채용 조건의 유연성을 발휘하여, 필요하다면 외부기관과의 겸임도 허용하고, 배우자와 자녀를 위한 정착 지원도 해야 한다. 한국인에게 특화된 조건 속에서 적응을 포기하고 떠나는 아까운 사례들이 없어져야 한다. 그들을 우리 사회의 진정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성공을 원한다는 것을 시스템과 문화로 말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안에 들어온 그들이 우리를 세계화시키는 촉진자가 될 수 있다.

곳곳에 ‘글로벌’이 화두로 등장한다. 갑진년, 우리의 국운이 용솟음치며 올라가기를 바란다면, 세계를 무대로 인류보편의 공통가치를 추구하는 선진국답게 살려면,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을 세계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지역이 곧 글로벌이란 의미로 글로컬이란 표현도 회자하고 있지만, 무늬만 글로벌은 곤란하다. 외지인을 주변인으로 만드는 지역적 폐쇄성을 탈피해야만 진짜 글로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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