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 피아니스트 지메르만의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탐미적인 연주

강애란 2024. 1. 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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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롯데콘서트홀 리사이틀…완벽주의 속 여유와 위트 지닌 '진정한 대가'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Bartek Barczyk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나성인 객원기자 = 예순여덟 백발의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여전히 새로웠다. 물론 관록이나 노련함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좋았을 테지만, 신선함과 호기심, 모험, 발전하려는 내면의 뜨거움이 더 강렬했다.

지난 수년간 한국 무대와 친숙해졌기 때문일까. 그는 예의 완벽주의 안에서도 여유로움과 위트를 보여줬다. 관객들도 보기 드문 집중력으로 그가 빚어내는 음 하나하나를 빨아들였다.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닌 연주자와 좌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함께 하나의 음악에 집중하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극히 밀도 있는 이 시간에 귀는 더 예민해지고,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감정이 깨어났다.

지난 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지메르만의 리사이틀은 바로 그런 듣기의 경험을 선사해 준 최고의 무대였다. 신년 벽두에 한국을 찾은 이 거장은 나이가 무색하게 더 발전하고 변모하는 싱싱함을 여전히 드러냈다. 1부의 쇼팽, 2부의 드뷔시와 시마노프스키는 마치 거대한 한 작품처럼 느껴졌다. 큰 틀에서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저마다 다른 색채로 뻗어 나간 줄기들 같았다.

공연 1부 첫머리에는 많은 사랑을 받는 쇼팽의 녹턴 2, 5, 16, 18번을 차례로 연주했다. 지메르만은 표현하려는 욕심, 선율 라인을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말 그대로 밤의 명상에 잠긴 것 같았다. 많은 쇼팽 연주에서 그러하듯 지메르만 또한 여러 차례 루바토(임의로 템포에 변화를 주는 것)를 구사했지만, 템포나 감정을 과장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곡에 율동감을 부여하는 선에서 세련되게 처리했다. 네 곡의 녹턴 모두 셈여림의 폭이 크지 않게 읊조리듯 연주했지만, 여린 부분에서도 길고 짧음, 지속과 단절, 주음 대 반주음형 등의 대비를 섬세한 터치로 들려주어 생생하게 다가왔다.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Bartek Barczyk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부 후반부에는 일명 '장송 행진곡'으로 잘 알려진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연주했다. 녹턴에서 쇼팽의 서정성을 들려준 지메르만은 소나타에서는 극적 표현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1악장 1주제는 강렬한 추동력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지메르만은 세부의 기교적 악구들을 완전히 지배하면서도 전체를 관통하는 큰 호흡을 한시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작품을 넉넉히 장악하고 있는 듯했다. 흔히 강렬한 악상을 이어 나가다 보면 연주자의 호흡도 함께 가빠지거나 음악적 관성에 의해 과장된 표현이 생겨나기 쉬운데, 지메르만은 나아가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자신의 해석에 따라 흔들림 없이 표현했고, 그 결과 전체 작품의 구조적 아름다움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2악장 스케르초 악장에서도 그는 좌중을 압도하려는 제스처 없이 유머와 의외성에 방점을 찍었다. 가운데 부분의 서정적 선율과 처음의 날 선 리듬이 확실하게 대조된 것 또한 훌륭했다. 마지막 3악장 '장송 행진곡'은 이번 공연의 가장 놀라운 순간이었다. 그의 장송 행진곡은 장엄하고 위엄 있었다. 다소 느리고 엄숙한 '발걸음'은 템포 변화가 거의 없이 가운데 부분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로 인해 특히 중간 부분의 서정적 선율은 특별한 효과를 얻었다. 자연스럽게 노래하기에는 너무 느린 '장송 행진곡'의 템포가 오히려 고인의 생전 모습을 추념하는 듯한 경건한 느낌을 전해준 것이다. 참으로 대가다운 연주요, 빛나는 상상력이었다.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Bartek Barczyk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부 첫 곡인 드뷔시의 '판화'에서 지메르만은 소리를 섞는 마술사로 변모했다. 첫 곡 '탑'에서는 또렷한 고음역의 움직임과 모호하게 떠도는 저음역의 화성을 절묘하게 섞었다. 마치 높은 부분만 또렷이 보이고, 아랫부분은 안개에 잠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민속성이 두드러지는 두 번째 곡 '그라나다의 저녁'에서나 마지막 곡 '비 오는 정원'에서도 지메르만의 연주는 미묘했다. 건반을 가벼이 쓰다듬는 듯한 섬세한 타건으로 가벼이 부유하는 인상주의 특유의 색채를 한껏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시마노프스키의 폴란드 민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마치 인상주의 시대에 재림한 쇼팽을 듣는 듯, 앞서 연주했던 폴란드적-프랑스적 감성을 보다 모더니즘 시대의 색깔로 펼쳐 보인 작품이었다. 주제에 나타나는 친밀한 서정성은 작품의 핵심으로, 지메르만은 시종일관 예민한 선율적 감수성과 균형감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2번, 4번에서는 화려한 기교를, 7번에서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무궁동 풍의 움직임을, 작품의 내면적 정점이라 할 수 있는 6번에서는 사색적인 고백의 정을, 쇼팽을 연상시키는 8번 장송 행진곡에서는 격조 높은 엄숙함을 각각 들려주었다. 말 그대로 시마노프스키의 변주곡은 쇼팽과 드뷔시를 종합하는 듯 지메르만의 피아니즘 전체를 한데 모아 들려주는 듯했다.

이처럼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탐미적인 연주가 또 있을까. 굉장한 몰입 속에서도 평정과 여유로움을, 초절기교 속에서도 거리를 둘 줄 아는 지적인 정신을, 결코 식지 않는 열정 안에서도 고전적 엄격함을 동시에 들려주는 피아니스트. 그런 피아니스트가 곧 진정한 대가다.

lied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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