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러다임 변화, 또 다른 기회다[시평]

2024. 1. 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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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반도체 성능 향상 느려지는데
AI시대 진입으로 수요는 급증
메모리-연산 패키징 기술 중요
AI 반도체 동작은 매우 비효율
효율 높일 컴퓨팅 구조도 절실
산학연 협력 중요성 더욱 커져

하이테크 산업에서 후발 기업이 선발 기업을 따라잡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에 후발 기업이 역전할 기회가 주어진다. 새로운 패러다임 기술을 후발 기업은 적극 받아들이지만, 선발 기업은 기존 기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처지게 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브라운관 TV 산업에서 소니로 대표되는 일본 기업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국내 기업들이 2000년대 초반 디지털 TV로 바뀌면서 일본 기업을 역전할 수 있었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중심인 반도체 산업도 기술 경쟁 패러다임이 바뀌는 중이다. 지난 20년 이상 반도체 산업 경쟁력의 중심은 미세공정 생산 기술이었다. 오랫동안 인텔이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을 장악한 것도 공정 기술의 경쟁력 우위 때문이었고, 최근 들어 시장을 잠식당하는 것 또한 공정 경쟁력이 대만의 TSMC에 뒤처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성능을 결정하는 공정 기술은 대략 2년에 2배씩 발전해 왔는데 이를 ‘무어의 법칙’이라고 한다. 최근 반도체 미세공정 개발 속도가 점점 떨어지면서 무어의 법칙이 앞으로도 유효한지 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최대 기업인 엔비디아의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은 무어의 법칙이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반면, 인텔의 CEO인 팻 겔싱어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 CEO들의 엇갈리는 의견은 현재 개발 속도가 느려져 무어의 법칙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정 개발이 느려짐에 따라 반도체의 성능 향상 기대가 점점 어려워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개의 반도체를 하나의 패키지로 연결하는 기술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개별 반도체의 성능은 떨어지더라도 여러 반도체가 함께 동작하면서 적절히 역할을 분담하는 컴퓨팅 구조가 이뤄진다면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렇게 패키징 및 컴퓨팅 구조 기술이 발전하면 공정 기술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줄게 된다.

반도체 패러다임을 바꾸는 또 다른 요인은 AI 기술의 발전이다. 최근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거대 AI 기술은 반도체의 수요를 급격히 증가시켰다. AI에 사용되는 반도체 동작은 매우 비효율적인데, 그것은 인간 두뇌와는 구조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바둑으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AI 알파고의 초기 모델은 176개의 AI 반도체를 사용하며 1만W 이상의 전력을 소모한 것으로 예측된다. 20W 정도 소모하는 인간의 두뇌와 비교하면 매우 비효율적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두뇌에서는 데이터를 기억하는 기능과 데이터를 활용해 생각하는 기능이 함께 이뤄지지만, 반도체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와 데이터를 활용해 연산하는 프로세서 반도체가 분리돼 있고, 두 반도체 사이에 데이터를 주고받기 위해서 많은 전력 소모가 발생한다.

이런 전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 프로세서와 메모리를 효과적으로 연결하는 패키징 기술 개발이 활발하다. 또, 거대 AI 모델 저장을 위한 메모리 반도체의 개수가 늘고, 그 결과 다수의 메모리와 프로세서 간 역할 분담을 위한 컴퓨팅 구조도 중요해졌다.

그동안 반도체 공정 미세화 경쟁에서 후발 주자인 우리 기업이 선발 주자인 TSMC를 따라잡기 위해 힘든 경쟁을 해왔다. 그런데 패키징 및 컴퓨팅 구조가 중요한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역전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특히, AI를 위한 메모리 반도체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우리 기업이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게 됐다.

새로운 반도체 패러다임에서는 기술 경쟁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공정 미세화 경쟁은 7나노에서 5나노, 그다음 3나노에서 2나노로 목표가 명확하기 때문에 연구보다는 개발이 중요한 과정이었다. 반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반도체를 효과적으로 연결하는 패키징 기술과 함께 다수 반도체가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할지에 대한 컴퓨팅 구조를 제안하는 창의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산업체에서 수행하는 개발 과정뿐만 아니라, 대학과 연구소에서 연구 과정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으므로 개발과 연구가 함께 진행되는 산학연 협력을 지금보다 더욱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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