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균 사생활 '모를 권리'도 지켜달라"...경쟁적 보도가 남긴 숙제
이후 언론사들 경쟁적으로 사생활 보도
전문가 "공익성 없고, 인격권 침해"
KBS "실체 규명 위해 정제해 보도"
방심위 제재 여부에도 이목 쏠려
배우 고(故) 이선균씨는 경찰의 마약 투약 혐의 수사 과정에서 언론의 도 넘은 사생활 보도에 시달렸다. 가장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것이 공영방송인 KBS의 이씨와 유흥업소 실장 A씨의 전화통화 녹취록 보도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는 해당 보도와 관련해 KBS를 제재할지 여부를 검토 중이다. 이씨 보도 논란은 '국민의 알권리'와 '국민의 인권' 사이에서 언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숙제를 남겼다.
“시청자들이 ‘나한테 왜 알려줘’ 할 정도”
KBS는 지난해 11월 24일 ‘9시 뉴스’에서 '[단독] 유흥업소 실장 '5차례 투약' 진술… 이선균 측 '허위 주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씨와 그가 마약을 투약했다고 주장하는 A씨의 통화 녹음파일을 근거로 했다. KBS는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다른 언론들의 선정적인 인용 보도가 잇달았고, 지난달 27일 이씨 사망 이후 “수사와 관련 없는 사생활 보도로 망신을 주며 이씨를 압박했다. 언론은 국민의 '모를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KBS의 첫 기사와 이어진 기사들이 ①공익성이 없고 ②이씨의 인격권을 침해했으며 ③보도 윤리를 위반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④공영방송의 책무 포기라는 지적이 나왔다.
배정근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이씨의 사적 대화는 국민의 알권리에 해당하지 않는다"면서 "인격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개인 사생활은 반드시 필요한 때 외에는 보도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이어 “가장 엄격한 윤리강령이 있는 KBS가 '단독'이라며 자랑스럽게 보도한 것은 공영방송으로서의 정체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말했다.
심석태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도 “가십 전문 매체라면 다룰 수도 있었겠지만 전 국민에게 보편적·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영방송이 사적 대화를 보도한 것은 매우 아쉽다”며 “시청자들이 ‘굳이 나한테 이걸 왜 알려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보도였다”고 말했다.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공영방송도 저렇게 하는데’라며 KBS가 (다른 언론들을) 선정 보도에 뛰어들게 한 책임도 있다”고 말했다.
반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의 보도라는 의견도 일부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언론법 전문 변호사는 “통화 내용 중 꼭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보도한 것은 사회적으로 용인해야 한다”며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KBS "발언 신빙성 위해 정제해 보도"
KBS는 이씨 마약 투약 의혹의 실체 규명을 위한 보도였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10일 방영된 KBS 옴부즈맨 프로그램 'TV비평 시청자데스크'에서 박희봉 KBS 보도본부 사회부 팀장은 "마약 남용은 공중보건과 사회질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중대범죄이고 유명 연예인이 연루돼 사회적 관심이 큰 사안이라 언론이 실체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씨 사망 이후 KBS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는 않았다. KBS 내부에선 이번 사안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지난달 28일 열린 KBS기자협회 운영위원회 회의에는 해당 보도 부서의 중견 기자가 참석해 보도 경위를 설명했다. KBS 관계자는 “사적 대화를 보도에 넣은 것은 A씨 발언의 신빙성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었고, (녹음파일 중) 가장 정제된 부분을 신중하게 선별해 보도한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취재팀이) 보도 전에 사적 대화의 보도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논의했고, 변호사 자문도 받았다고 한다”며 "이후 다른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할 때도 KBS는 보도를 극도로 자제했다"고 덧붙였다.
방심위, KBS 제재할까
방심위에는 KBS 보도를 심의하라는 민원이 여러 건 제기됐다. 방심위 관계자는 “민원 내용에 대해 검토하는 단계”라며 “심의 여부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수의 언론학자들은 KBS의 보도가 나쁜 보도였음에도 방심위가 규제할 사안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김형일 극동대 교수는 “보도 기준은 언론이 자율적으로 판단할 문제로, 법적 제재는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어서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반면 “유튜브가 하던 가십 보도가 언론에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윤복실 서강대 연구교수), “심각한 취재윤리 위반이므로”(신 사무처장) KBS의 보도를 제재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전문가들은 언론의 자정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배 교수는 “적어도 공영방송과 주요 매체들은 이런 보도를 하지 않도록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rara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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