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리도 반했다'…테팔의 거액 양도 제안 거절한 회사 [강경주의 IT카페]

강경주 2024. 1. 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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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주의 IT카페] 108회
휴롬 창업주 김영기 회장 10년 만의 인터뷰
2세대 스크루로 '2023 특허기술상' 대상 수상
"영양제보다 채소·과일 먹어야 '진짜' 건강"
"지난해 조직 개편 등 재정비…올해부터 도약"
"고객이 원하면 무조건 되게 만들어야"
"내년 매출 3000억원, 5년 후 1조원 달성할 것"
김영기 휴롬 회장이 경남 김해 휴롬 본사 4층에 위치한 회의실에서 착즙 핵심 부품인 멀티 스크루를 들고 설명을 하고 있다. 멀티 스크루를 직접 개발한 김 회장은 '2023년 대한민국 특허기술상'에서 대상인 '세종대왕상'을 수상했다. / 사진=강경주 기자


세계적인 주방 가전 기업 테팔이 거액을 제시하며 특허권 양도를 제안했을 땐 돈 때문에 지독스레 고생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거절했다. 평생을 바쳐 발명한 독자 기술을 해외에 넘길 수는 없었다. 글로벌 착즙기 1위 휴롬을 창업한 김영기 회장 얘기다. 김 회장은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며 "지금도 자택에 개인 연구실을 두고 직접 도면을 그리는 이유는 발명한 기술로 인류를 건강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힘줘 말했다.

2024년 휴롬 '제 2창사' 원년

지난 29일 김 회장을 만나기 위해 경남 김해시 주촌면 휴롬 본사를 찾았다. 그는 인터뷰를 하기 전 기자에게 주스를 한 잔 권하며 "건강을 위해선 반드시 채소와 과일을 날 것 그대로 섭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일·채소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집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가진 김 회장은 "지난해 휴롬은 한 단계 성장을 위해 체질개선을 꾀하고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며 "올해는 '제2의 창사'에 준하는 혁신의 원년이 될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30년 가까이 착즙 한 분야만 고집스레 연구한 휴롬은 2006년 채소와 과일을 저속으로 지그시 눌러 짜는 '저속 착즙 방식'(SSS·Slow Squeezing System)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슬로우 주스(인공 재료와 기계 가공 등을 배제하고 만든 주스) 시장을 개척했다. 2014년 매출 3000억원을 웃돌며 최고 실적을 썼지만 중국 사드 사태 직격탄을 맞는 위기도 겪었다. 이후 점차 회복세를 보여 지난해 매출은 1270억원까지 끌어올렸다.

기존 스크루(좌)와 2세대 멀티 스크루(우) 비교샷. 2세대 멀티 스크루는 상하부 탈착이 가능한 두 개의 모듈이 착즙 드럼 사이에서 재료에 압력을 가한다. 특히 망 드럼 대신 상하부 결합 시 형성되는 틈을 통해 즙과 퓨레(찌꺼기)를 효과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핵심 기술이다. / 사진=휴롬


휴롬 착즙기는 재료를 칼날로 갈아내는 기존 믹서와 달리 재료를 꾹 눌러 즙을 짠다. 이렇게 만든 주스는 재료에 마찰열과 충격을 거의 주지 않기 때문에 파이토케미컬과 효소, 천연 비타민 등의 영양소 파괴가 적고 맛 변형도 일어나지 않는다. 저속 착즙이 가능했던 건 김 회장이 발명한 스크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휴롬의 주력인 'H300'과 'H400', 'H410' 착즙기에도 '2세대 멀티 스크루'가 탑재됐다.

2세대 멀티 스크루는 조립, 착즙, 세척 등 전 과정에서 기존 사용자의 불편함을 개선했다. 이전 세대는 촘촘한 구멍이 있는 망 타입의 드럼(착즙이 이뤄지는 본체 내부 하단부)과 재료를 강하게 압착하는 식으로 구동됐다. 하지만 착즙 시 구멍이 막히고 세척이 번거롭다는 불편함이 제기됐다.

2세대 멀티 스크루는 상하부 탈착이 가능한 두 개의 모듈이 착즙 드럼 사이에서 재료에 압력을 가한다. 특히 망 드럼 대신 상하부 결합 시 형성되는 틈을 통해 즙과 퓨레(찌꺼기)를 효과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핵심 기술이다. 김 회장은 "멀티 스크루는 수천번의 시도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며 "손으로 일일이 깎아가며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이같은 노력을 인정받아 2세대 멀티 스크루는 '2023년 대한민국 특허기술상' 시상식에서 대상인 '세종대왕상'을 수상했다.

지금도 김 회장은 스크루를 연구 중이다. 회전축의 나선면이 돌아가면서 묵직하게 누르는 힘으로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즙을 짜낼 수 있을지, 소비자가 더 편리하게 사용하려면 어떤 기능이 필요할지를 고민한다.

1996년 동아산업을 세운 김영기 회장은 독자 기술로 녹즙기를 개발했다. 동아산업 당시 회의실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 사진=휴롬

자금난·기술도용·대기업 갑질에도 기술 개발 전념

경남 김해가 고향인 김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동네 사람들은 물건이 고장나면 죄다 김 회장에게 갖고 왔다. 무엇이라도 뚝딱하고 수리해내던 그를 보고 김해에선 '인물이 났다'는 얘기가 돌았다. 중학교는 부산 개성중과 경남고를 나왔다. 졸업 후에는 연세대 전기공학과에 진학했다. 연대 졸업장만 있으면 대기업을 골라가던 시절이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일찍이 직장 생활엔 뜻이 없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1974년 TV부품 제조업체 개성공업사를 설립, 1979년 전자부품 및 주방가구 제조업체 판정정밀을 세웠다. 당시 국내 전자업체들은 일본에서 TV 부품을 모두 수입·조립해 팔았다. 김 회장은 "일본 사람도 하는 걸 내가 못할 게 뭐 있나"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간단한 TV 부품을 만들어 금성사(현 LG전자) 등에 납품했다.

그러나 회사 운영은 기술 개발과는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 하청업체가 대기업을 상대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김 회장은 세상에 없는 독보적인 제품을 만들어야 휘둘리지 않는다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떠오른 것이 '건강'이다. 김 회장은 현대인들의 식습관 변화에 주목했다. 채식에서 육식, 인스턴트 식품으로 빠르게 변화하던 시대였지만 과하다고 판단했다. 머지 않아 건강 식품을 찾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1996년 동아산업을 세운 김 회장은 독자 기술로 녹즙기를 개발했다. 물론 과정은 쉽지 않았다. 기술을 확보하기 까지 3000번이 넘는 실패를 겪었다. 젊었을 때 부산 엄궁동 농산물 도매시장 상인들 중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1주일에 두세 번씩 나타나 짓무른 과일과 채소를 한 트럭씩 매입했다. 상한 주스를 파는 악덕업자라는 소문도 퍼졌다. 실험용이라고 해도 믿지 않았다.

김 회장이 짓무른 작물을 사들인 이유는 스크루 마모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과일과 채소를 갈아야 하는데 신선한 제품을 쓸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3000여개의 스크루가 불합격 판정을 받고 폐기됐다.

동아산업 시절 김영기 회장의 모습 / 사진=휴롬


그렇게 개발한 녹즙기는 초기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이내 시련이 닥쳤다. 유사제품이 쏟아져 나왔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총판일을 담당하던 직원들이 퇴사 후에 따로 회사를 차려 유사품을 만드는 일도 벌어졌다. 설상가상 언론에선 "녹즙기에서 중금속이 나왔다"며 쇳가루 파동을 연일 보도했다. 소비자 반응은 급격히 싸늘해졌다. 김 회장은 "쇠끼리 부딪치면서 나오는 쇳물이 문제인데 우리 제품은 기어가 하나여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며 "하지만 소비자들은 막무가내로 외면해버리더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돈에 쪼들리는 날도 계속됐다. 채권자들은 날마다 집과 회사를 번갈아 찾아왔다. 직원 월급도 주지 못했다. 그렇게 5년여를 버텼지만 한계를 절감했다. 어떻게든 판로를 뚫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아들 재원씨를 전략기획실장으로 불러들였다. 온라인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휴롬의 주력 제품인 H410 / 사진=휴롬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은 김 회장은 2000년에 '오스카 만능 녹즙기'를 세상에 내놨다. 당시 중소기업박람회에서 인기상품으로 선정됐을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여기에다 공동구매한 소비자들이 인터넷에 제품 사용 후기를 올리자 홈쇼핑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2009년 GS홈쇼핑의 첫 방송을 탄 날 30대가 팔렸다. 그 다음엔 50여대, 100대 등으로 점점 늘어나더니 방송 시간대도 황금시간대로 바뀌었다.

2009년에는 중국 홈쇼핑에서 판매를 시작해 현지에서만 연간 1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2013년 11월에는 중국 '광군제'에서 2초당 1대씩 제품을 판매했다. 하루에 180억원을 번 날도 있다. 당시 휴롬 착즙기는 중국에서 '초코파이'와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한국 제품으로 꼽혔다. 해외 주문도 폭발했다.

김 회장은 "휴롬은 전세계 슬로우 주스 시장의 리딩기업으로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법인을 중심으로 전세계 80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며 "2022년 매출 기준 수출 비중이 60% 이상"이라고 밝혔다.

휴롬의 기술력을 눈여겨본 글로벌 기업들의 러브콜도 잇따랐다. 특히 프랑스 가전업체 테팔은 거액을 제시하며 특허권 양도를 제안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더 큰 꿈이 있었다. 독자 기술을 가지고 해외 시장을 직접 뚫어 더 크게 회사를 키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권위 있는 식품영양연구소 설립해 R&D 강화"

김 회장이 이토록 건강한 먹거리를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오메가3, 비타민 등 건강기능식품들의 광고를 보면 계속 효능과 말이 바뀐다"며 "기존에 해왔던 것은 효과가 없다면서 또 새로운 형태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인류 건강에 오히려 해가 된다"고 지론을 펼쳤다.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은 인공적인 영양제로 대체할 수 없고, 자연의 음식을 통해서 먹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건강에도 좋다는 게 김 회장의 평소 신념이다.

최근 휴롬은 가수 이효리를 모델로 낙점하고 TV 광고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 사진=휴롬


최근 휴롬은 가수 이효리를 모델로 낙점하고 TV 광고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김 회장은 "휴롬의 핵심 가치인 '건강'과 이효리씨의 채식 등 건강한 삶에 대한 가치가 서로 잘 어울린다"며 "자연 그대로의 채소 과일이 우리 몸을 가장 건강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메시지를 '이효리 마케팅'을 통해 대대적으로 확산하려 한다"고 했다.

휴롬은 올해 김해 신공장 착공을 통해 채소·과일과 건강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식품영양연구소도 설립한다. 김 회장은 "건강은 영양제가 아니라 채소와 과일 등 식물로 지키는 것이라는 인식을 널리 알리고 싶다"며 "그럴려면 권위있는 기관 설립이 필수이고, 작업이 순로롭게 잘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매출은 2025년 3000억 달성을 시작으로 5년 내 매출 1조 달성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도 밝혔다.

후배 기업인들을 위해 도움말을 해달라는 요청에는 "고객이 기업에 원하는 답변은 '어떤 이유로 어렵다'가 아니라 '무조건 되게 하는 것'"이라며 "고객의 요구는 절대 틀리지 않기 때문에 경청하다 보면 최고의 해법이 나온다"고 조언했다.

후계자인 김재원 휴롬 대표를 향한 조언도 말도 잊지 않았다. 김 회장은 "인류 건강을 위해 채소·과일을 많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조금이라도 세계인의 건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달라"고 당부했다.

김영기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직접 제품 설명을 하고 있다. / 사진=휴롬


김해=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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