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KBL 최초 테크니션 외국 선수 제럴드 워커
1997년은 대한민국 남자농구에 중요한 한 해다. 프로농구가 처음으로 출범했기 때문. 한국 남자농구는 농구대잔치 시절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프로화를 성공했다.
외국 선수도 들어왔다. 원년이라 많은 정보가 없었지만, 각 구단은 여러 유형의 외국 선수를 데려왔다. 기존 국내 선수와 한층 더 강해진 전력을 뽐냈다. 많은 볼거리도 제공했다. 원년부터 두 시즌 동안 프로농구를 누빈 제럴드 워커가 단연 대표적이다. 테크니션을 상징하는 외국 선수이기 때문이다.
프로농구 진출 이전
워커는 어린 시절 가족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남다르게 빨랐던 워커는 미식축구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농구공을 본격적으로 잡았다. 엄청난 스피드를 비롯한 탁월한 운동 능력으로 코트를 누볐다. 교내 최고 스타로 곧바로 발돋움했다.
교내 스타가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경기마다 호쾌한 슬램 덩크를 터트렸고, 백 보드를 부수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키 작은 워커의 백 보드 파괴 덩크(?)는 많은 좌중을 놀라게 했다. 그래서 워커의 영향력도 작지 않았다.
고교 졸업반이던 워커는 여러 학교로부터 입학 제의를 받았다. 자신이 진학한 샌프란시스코대학교를 포함해, 애리조나대학교와 오클라호마대학교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워커의 선택은 샌프란시스코대학교. 전력이 돋보이지 않았던 팀이라, 워커가 많이 뛸 수 있었다.
사실 샌프란시스코대학교는 빌 러셀과 K.C. 존스, 빌 카트라이트 등 내로라하는 NBA 선수들의 출진 학교다. 이들 모두 모교로부터 영구 결번을 얻어냈다. 그러나 1990년대 샌프란시스코대학교 출신 선수 중 돋보였던 자원은 많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워커의 샌프란시스코대학교 입학은 수긍할 만했다.
하지만 워커가 뛰는 4시즌 동안, 샌프란시스코대학교는 NCAA 토너먼트에 나서지 못했다. 정규시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워커가 있는 기간 동안, 샌프란시스코대학교는 컨퍼런스 우승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워커는 대학 무대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네 시즌 동안 평균 17.9점이라는 높은 득점력을 자랑했다. 주전 포인트가드임에도, 발군의 공격력을 뽐냈다. 당시 기준으로 교내 정규시즌 누적 득점 7위와 야투 시도 1위, 스틸 1위와 어시스트 3위를 기록했다. 특히, 1993~1994시즌에는 전미 평균 스틸 2위에 오르는 등 상대 공격 흐름을 확실하게 끊었다. 지난 2005년에는 모교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대학 시절에 빛났던 선수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NBA 도전은 여의치 않았다. 워커는 NBA로부터 지명을 받지 못했고, NBA의 여러 하부리그를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러나 슈팅에 약점을 갖고 있어, NBA 선수로는 부름을 받지 못했다. 미국에서도 어려운 선수 생활을 했다.
1997 시즌 : NO.8
KBL이 출범했다. KBL 원년 시즌에 나선 군단들은 외국 선수 지명에 나섰다. 전체 2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었던 안양 SBS(현 안양 정관장)는 워커를 구단 역사상 첫 외국 선수로 낙점했다.
당시 SBS는 오성식이라는 주전 포인트가드를 보유했다. 그러나 김동광 SBS 감독(전 KBL 경기본부장)은 외국 선수 트라이아웃에서 워커의 공격 전개와 운동능력을 높이 샀다. 그리고 데이먼 존슨을 두 번째 라운드에서 지명했다.
그리고 정재근(전 연세대 감독)이 핵심 전력 중 하나였다. SBS는 ‘워커-오성식-정재근-존슨’으로 짜임새 있는 주전 전력을 구축했다.
워커와 정재근이 공격을 이끌었다. 특히, 워커의 화려한 드리블 실력과 유려한 발재간은 당시 많은 팬들을 농구장으로 불러들였다. 덕분에, SBS는 인기 구단으로 거듭났다. 상위권으로도 도약했다.
그리고 워커는 KBL 최초 어시스트를 달성했다. 이상범(전 원주 DB 감독)을 KBL 득점 1호 선수로 만들었다. 그리고 1997년 2월 19일에 열린 대전 현대(현 부산 KCC)와의 경기에서 21점 11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달성했다. KBL 역대 최초 트리플 더블이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1997년 3월 초에 열린 인천 대우(현 대구 한국가스공사)와의 경기에서는 31점을 퍼부었다. 8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곁들인 것도 모자라, 홀로 14스틸을 뽑아냈다. 프로농구 역사상 한 경기 최다 스틸을 작성했다.
남다른 인기와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던 워커는 KBL 최초 올스타전에도 나섰다. 올스타전에서는 보다 화려한 개인기를 뽐냈다. KBL 첫 올스타전의 최우수 선수가 됐다. 시즌 막판에는 베스트 5에도 선정되는 등 원년부터 가장 많은 인기와 화제를 창출했다.
한편, 워커가 이끄는 SBS는 부산 기아(현 울산 현대모비스), 원주 나래(현 원주 DB)와 함께 상위권 다툼을 벌였다. 시즌 막판에 4연승을 질주했고, 정규리그 2위를 차지했다. 2위에 오른 SBS는 자력으로 4강 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워커가 단연 일등공신이었다.
SBS는 나래와 결승 진출을 다퉜다. 그러나 워커가 힘을 쓰지 못했다. 주포라 할 수 있는 워커가 나래의 집중 견제에 시달리면서, SBS의 위력도 반감이 됐다. 정규리그에서 보여줬던 경기력을 좀처럼 발휘하지 못했다.
SBS는 시리즈 첫 두 경기에서 나래의 칼레이 해리스를 막지 못했다. 이로 인해, 시리즈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적지에서 한 경기를 따내긴 했으나, 워커는 살아나지 못했다. SBS는 결국 탈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BS는 워커와 재계약을 바랐다. 워커가 비록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했지만, 워커가 지닌 실력이 대단했기 때문. 무엇보다 토종 선수를 살릴 수 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SBS는 워커와 함께 하지 못했다.
이유는 이랬다. 워커는 NBA 무대에 도전하고 싶었다. 한국을 뒤로 하고, 태평양을 다시 건넜다. 그리고 NBA 하부리그 중 하나였던 USBL(United States Basketball League)에서 뛰기로 했다. 그러나 빅 리그의 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단신에 외곽슛도 약했고, 운영 능력이 미국 선수들 사이에서는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
1998~1999 : NO.3
NBA 진출이 여의치 않았던 워커는 바다를 다시 건너기로 했다. 한국에서 뛰기 위해, 1998 KBL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 명함을 내밀었다. 워커가 뛰게 된 팀은 또 한 번 SBS.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확보했던 SBS와 또 한 번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SBS도 워커도 원년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빅맨 외국 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었기 때문. 게다가 빅맨을 소화했던 정재근이 노쇠화를 피하지 못했다. 상대 외국 선수와의 매치업을 극복하기 어려웠고, 워커가 이끄는 공격도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워커가 개인기로 상대를 제치더라도, 빅맨 외국 선수와 마주했다. 워커가 예전처럼 마무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커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졌다. 정재근과 김상식(현 안양 정관장 감독) 등 주축 자원들이 주춤했기 때문.
그래서 워커는 팀 내 평균 득점과 평균 어시스트, 평균 스틸 모두 1위를 차지했다. 평균 리바운드도 2위를 기록했다. 팀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활약했다. 그러나 국내 선수와 다른 외국 선수가 받쳐주지 못하면서, SBS는 7위로 정규리그를 마쳐야 했다. 플레이오프에도 나서지 못했다.
KBL을 떠나
1998~1999시즌 종료 후, 워커는 SBS와 재계약하지 못했다. NBA에 다시 도전했다. 지난 2002~2003시즌에는 NBDL(현 G-리그) 소속 모바일 리빌러에서 30경기를 나섰고, 이 중 21경기에서 주전으로 뛰었다.
시즌 내내 주전으로 활약했다. 경기당 19.2분을 소화했고, 평균 5.6점 3.6리바운드 2.8어시스트에 1.3개의 스틸을 기록했다. 3점슛 성공률(약 9.1%)이 개선되지 않은 것은 물론, 한국에서처럼 공격을 주도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워커의 소속 팀인 모바일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모바일은 준결승과 결승을 내리 이겼다. 우승을 차지했다. 워커가 프로 데뷔 후 처음 경험한 우승이었다.
사진 제공 = KBL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considerate2@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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