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은 특수고용직인 캐디도 ‘직장 내 괴롭힘’으로부터 보호해야 할까[설명할경향]

김지환 기자 2024. 1. 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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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15일 근로기준법(근기법)이 개정되면서 ‘직장 내 괴롭힘’ 개념이 처음으로 근기법에 새겨졌습니다. 개정 근기법은 ‘사용자 또는 노동자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노동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정의하고, 이를 금지했습니다.

다만 특수고용직 노동자는 근기법상 직장 내 괴롭힘 조항 적용을 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근기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특수고용직 노동자로부터 노무 제공을 받는 사업주는 직장 내 괴롭힘을 예방할 의무가 없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사업주에겐 민사상 불법행위 책임이 있습니다. 아울러 사업주가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부터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근거 조항으로 산업안전보건법 5조(사업주 등의 의무)를 언급한 판례도 최근 나왔습니다.

“괴롭힘 피해자, 꼭 노동자일 필요 없어”

2019년 7월부터 경기 파주에서 건국대가 운영하는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던 A씨(사망 당시 27세)는 캐디들을 통솔·관리하는 ‘캡틴’ B씨에게 지속해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캐디는 대표적인 특수고용직 노동자입니다.

B씨는 다른 캐디도 들을 수 있는 무전으로 A씨에게 지시를 하면서 “뚱뚱해서 못 뛰는 거 아니잖아. 뛰어” “오늘도 진행이 안 되잖아. 오늘도 또 너냐” 등 모욕적 발언을 했습니다. A씨는 2020년 8월28일 근무수칙, 출근표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온라인 카페에서 탈퇴당하는 등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A씨는 그해 9월14일 B씨를 만나 사직서를 제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민사1부(재판장 전기흥)는 A씨 유족이 가해자 B씨, 건국대 법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고들에게 배상 책임이 있다고 지난해 2월15일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가 반드시 노동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밝혔습니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 해도 직장 내 괴롭힘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판부는 가해자뿐 아니라 사업주인 건국대의 불법행위 책임도 인정했습니다. “건국대가 가해자 사무감독에 상당한 주의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항소심 판결에서 새로 등장한 ‘산안법 5조’

1심 재판부는 산안법상 노무제공을 받는 사업주가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부터 보호할 의무가 있는지는 직접적으로 판단하진 않았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달리 이 쟁점에 대해 판단을 했습니다.(항소심 재판부는 양측 항소를 모두 기각해 1심 결론은 유지됐습니다.)

서울고법 민사33부(재판장 구회근)는 지난달 21일 건국대의 배상책임 범위를 설명하면서 “골프장 캐디는 특수형태근로자로 사업주인 건국대는 골프장 경기보조원이었던 A씨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산안법 5조, 77조, 시행령 67조 참조), B씨 불법행위를 알 수 있었음에도 A씨가 사망에 이르기까지 A씨를 위한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건국대가 산안법 5·77조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행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유족 대리인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유족 대리인인 직장갑질119 윤지영·강은희 변호사가 소송 과정에서 특별히 주목한 조항은 산안법 5조2호였습니다. 산안법 5조2호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로부터 노무제공을 받는 사업주도 ‘노동자의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을 줄일 수 있는 쾌적한 작업환경의 조성 및 근로조건 개선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을 예방하는 것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작업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동전의 앞뒷면입니다. 이 항소심 판결이 대법원에서도 확정되면 특수고용직 노동자로부터 노무제공을 받는 사업주가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막기 위한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은 산안법상 의무를 다하지 못한 불법행위로 자리잡게 됩니다.

다만 사업주 의무를 포괄적으로 규정한 산안법 5조2호의 해석론을 통해 직장 내 괴롭힘 예방 의무를 끌어내는 것을 넘어 이참에 입법적으로 ‘교통정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캐디를 포함한 특수고용직 노동자로부터 노무제공을 받는 사업주의 구체적인 안전보건조치 의무는 산안법 77조·안전보건규칙 672조에 있습니다. 캐디에 대한 사업주 안전보건조치 규정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산안법은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만큼 특수고용직 노동자 직장 내 괴롭힘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번처럼 구체적 피해 사례도 드러났으니 항소심 판결이 확정되면 안전보건규칙 개정 등 입법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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