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유예, 또 유예…‘행정독재’로 가나

전종휘 기자 2024. 1. 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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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해 7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뉴스룸에서] 전종휘|사회정책부장

법문은 명확하다. 해석의 여지는 별로 없다.

근로기준법 얘기다. 이 법 50조는 “1주간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또 53조에서는 사용자와 노동자가 합의하면 1주에 12시간을 한도로 노동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고 한다. ‘주 40시간제’가 원칙이되 그 예외적 조처로 ‘주 최대 52시간까지’는 허용한다는 얘기다.

이 법이 숱한 우여곡절 끝에 2018년 3월 개정된 건, 그 전까지 고용노동부가 이상한 행정 해석으로 장시간 노동을 조장한 탓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근로기준법에서 얘기하는 1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 이틀간 8시간씩 16시간을 더한 ‘주 최대 68시간’(52시간+16시간) 장시간 노동이 일터에서 남발됐다.

국회가 당시 ‘1주일은 휴일을 포함한 7일’이라는 새삼스러운 내용을 넣어 근로기준법을 개정한 배경이다. 이때도 ‘남이야 1주일에 40시간 일하든, 120시간 일하든 자유계약의 시대에 법이 왜 이런 것까지 관여하고 심지어 처벌까지 하느냐’는 문제 제기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사용자의 힘이 압도적인 취업과 고용 시장에서 노동자가 자유의지로 노동시간을 결정하는 건 불가능한데다, 장시간 노동이 노동자 건강에 끼치는 폐해가 너무 크다는 인식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기에 본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다만 국회는 법 개정 당시 53조 3항에 연장근로 제한에 대한 예외 조항을 뒀다. 30인 미만 업체 사용자가 근로자대표와 서면으로 합의하면 1주에 추가연장근로 8시간을 더해 최대 60시간까지 일을 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만연했던 최장 68시간 노동 체제에서 52시간으로의 급격한 단축이 불러올 영세 사업장의 충격을 덜어주려는 선의였을 테다. 다만 법 부칙은 이 예외 조항이 “2022년 12월31일까지 효력을 가진다”고 명토 박았다. 2023년이 오기 전까지 소규모 사업장들은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업무 조정, 추가 고용 등을 준비하란 뜻이다. 따라서 30인 미만 사업장의 8시간 추가연장근로는 2023년 1월1일부터 효력을 잃었다. 이게 현행법이다.

그런데 이 조항은 법이 개정된 지 6년이 다 되도록 법률로서의 효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부가 지난해 1월 계도기간을 준다는 명분으로 즉각 시행을 미룬 데 이어 올해 1년 추가로 연장하기로 하면서다. 정기근로감독 때 장시간 노동은 점검 대상으로 삼지 않고, 1주에 해당 사업장 노동자가 60시간을 일하다 적발돼도 사용자를 처벌하는 대신 법이 예정하지도 않은 별도의 시정조치 기간을 주기로 했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시간 규정을 위반한 사용자를 2년 이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정부가 헌법이나 법률의 하위 규정에 불과한 행정조처로 명확하게 정해진 법 규정을 무력화하는 지금의 이 상황에선 ‘행정독재’의 냄새가 조금씩 난다.

정부는 한국노총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근로시간 개편 방안을 논의해 계도기간을 이른 시일에 끝내겠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노총은 벌써부터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들러리 서기 위해 사회적 대화에 복귀한 게 아니”라고 반발한다. 정부가 원하는 대로 근로시간 개편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이를 토대로 국회에 근로기준법을 개정해달라는 청구서를 내밀긴 쉽잖을 것이다.

정부가 진즉 재원을 마련해 이들 영세 업체의 ‘주 52시간제 안착’을 위한 지원에 나섰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탈법적인 행정으로 혼란을 자초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수 부족 우려에도 대기업 법인세 깎아주고, 부자 세금 깎아주고, 심지어 주식이나 펀드 등 금융 투자로 생긴 소득세마저 폐지하는 마당에 이들 업체를 지원할 재원은 마련하지 못한 이 정부를 정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는 27일부터 적용을 앞둔 50인 미만 사업장의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 시행을 극렬히 반대하는 정부가 이마저도 계도기간을 두겠다고 나설까 두렵다. 이쯤 되면 행정적 조처로 헌법과 법률을 무력화하는 진정한 ‘행정독재’의 시대가 열린다고 봐도 무방할 터다. 이 정부는 언제까지 영세 업체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장시간 노동과 죽음의 공포가 만연한 불안전한 일터에 두고자 하는가.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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