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시계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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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에디터 생활을 10년 넘게 해온 내가 가장 많이 가본 외국은 스위스였지만 시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건 2019년 도쿄에서부터였다. 당시 다니던 직장에서 카시오의 지샥을 주제로 책을 만들었다. 그때 만난 담당자와 취재원들이 시계를 좋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들이 시계를 즐기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비싼 물건이라서가 아니었다. 시계를 바라보는 각자의 분석과 맥락이 있었고, 개개인이 시계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만큼 다양했다. ‘앞으로 여러 일로 도쿄에 자주 와야지’라고 생각한 바로 그다음 해 코비드-19가 창궐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23년 11월 도쿄에 도착했다. 못 본 지 좀 된 일본의 지인들을 만나고 싶었다. 이번 일본행에서 처음 만난 지인은 <호딩키> 일본 에디터 와다 마사하루였다. <호딩키>는 뉴욕에서 시작한 온라인 기반 시계 미디어고, 와다는 일본 <허스트>가 만든 <호딩키> 일본의 에디터다. 일본에는 이미 시계 잡지가 많지만 <호딩키> 일본은 두 가지가 다르다. 온라인과 젊은이. 일본 출판계 역시 디지털 전환이 늦기 때문에 디지털로 시작한 <호딩키>가 확실히 유연성이 높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와다와 친구들로 대표되는 일본의 젊은 시계 애호가들의 문화였다. 와다는 직접 시계 애호가 클럽도 주도해 운영하고, 자기처럼 젊은 사람들이 이끄는 시계 애호 문화는 일본에 없었다고도 했다. 그 젊은 감각으로 <호딩키>는 3백 개 한정 <호딩키>×론진 컬래버레이션 줄루 타임 같은 시계를 출시했다. 론진 같은 회사가 <호딩키>라는 미디어를 ‘새로운 디자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이자 ‘물량 3백 개는 소화할 브랜드’로 간주했음을 뜻한다. 와다 등 <호딩키> 에디터들이 이 시계에 대한 홍보성 콘텐츠를 만들기도 했다. 라이프스타일 매체에서 콘텐츠와 광고, 미디어와 커머스의 경계는 이렇게 흐릿해지고 있었다.
와다는 <호딩키> 일과 별도로 젊은 시계 애호들의 클럽도 운영한다고 했다. 이름뿐인 커뮤니티가 아니었다. 와다는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 하나를 보여주었다. 어느 대형 고급 시계 브랜드에서 고급 시계를 클럽 한정판으로 제작하는 프로젝트였다. 한정판의 디테일은 그 클럽의 이름 같은 걸 적는 게 아니라, 다이얼의 세공 패턴을 미묘하게 달리하는 정도였다. 럭셔리의 특징이 개인화라고 봤을 때 이들은 정말 럭셔리를 실천하고 있었다. 남이 알아보는 것과 재판매 시세를 중시하는 한국에선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와다를 만난 날 저녁에 S씨를 만났다. S씨는 일본 취재에서 알게 된 재일교포 회사원이자 시계 애호가. 젊을 때 열심히 벌어서 시계도 적당히 샀다. 파네라이나 바쉐론 콘스탄틴처럼 누구나 알 만한 좋은 시계를 두고 그는 처음 보는 시계를 차고 나왔다. 크라우드펀딩으로 구매한 스위스의 인디 브랜드 시계라고 했다. S씨는 그 시계를 두고 2백만원대인데 마이크로 로터를 썼고 생각보다 세공 품질도 좋다며, 한국의 웬만한 시계 담당 에디터도 잘 모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평소에 돈과는 상관없이 교양이 풍부해지는 지식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의 시계 애호 역시 교양의 측면이 있었다.
도쿄 시계 애호의 깊이는 우연히 가게 된 시계 브랜드의 행사에서 가장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시계 전문지 <크로노스> 일본 편집장 히로타 마사유키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시계 저널리스트인데 시계 오타쿠 출신이라 성격도 소탈하다. 인터뷰 자리에서 알게 되어 안부를 주고받은 뒤 그가 좋아하는 한국의 막걸리를 사다주곤 했다. 이번에는 얼굴이라도 보자며 나를 부른 곳이 글라슈테 오리지널 긴자 부티크였다. 그렇게 어쩌다 남의 나라에서 브랜드 행사까지 참여했는데 강의 수준도 상당했다. 제목은 ‘독일 시계 이상의 독일 시계’. 강의 내용도 보도자료 수준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확인하고 객관적인 비교항을 나열한, 말 그대로의 강연이었다. 손님의 집중도 굉장히 높았다. 수준 높은 시장임을 내 눈으로 확인한 것 같았다.
서울의 시계 문화(라는 게 있다면)는 거의 과시, 투자, 유행이라는 키워드 안에 있다. 웃돈을 뜻하는 ‘P(프리미엄의 P)’만 생각하고, 투자가치가 있는 롤렉스만 좋아한다. 물론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 투자와 과시와 유행 풍조가 퍼져 있고, 롤렉스는 어찌 봐도 좋은 시계다. 그러나 그것만이 시계 애호는 아니다. 세계적인 대도시는 단순한 고가품 자랑에서 한발 더 나아간 시계 애호의 양상을 보인다. 이번에 본 도쿄도 그랬고, 다른 선진 도시도 비슷하다. 뉴욕이든 파리든 런던이든 손목시계는 각각의 교양에 더 가깝다. 세속 교양으로서의 시계 애호는 서울에서 요원한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몇몇 괴짜 애호가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한국은 시계 사기 좋은 나라이기도 하다. 해외에서 인기 있는 시계가 아직 저렴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Editor : 박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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