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터졌는데 고상한 추상을 그린다고?”…‘배신자’ 다시 왕관을 쓰다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4. 1. 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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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장 완전정복⑳ 필립 거스턴]
60년대 미국 추상 대표작가
반전·저항의식에 구상 회귀
전쟁 등 소재 만화처럼 그려
KKK단 그린다는 논란에도
전미·유럽서 미술관 회고전
재평가에 300억 작가로 부활
아트바젤 마이애미비치에서 260억원에 팔린 필립 거스턴의 ‘밤의 화가’ [아트바젤]
1950년대 뉴욕은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비단 전후의 풍요 때문만이 아니었죠. 파리에서 예술 수도 자리도 가져왔습니다. 화가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정점에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1913~1980)과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등과 함께 추상표현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1960년대를 통과하면서 돌연 거스틴은 추상미술을 떠나 구상으로 회귀합니다. 떠들썩한 스캔들이었습니다. 신대륙을 개척한 이들에게 구상이란 과거이자, 악습이었죠. 거스턴은 ‘배신자’로 낙인찍혀 손가락질 받습니다. 배신의 계기는 그의 추상회화는 순수회화라는 통념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예술은 불순한 것이었으니까요. 1960년대는 베트남 전쟁과 ‘68 혁명’이 있었고, 미국에서 시민권과 반전 시위로 인한 암살과 폭력이 난무한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1960년대에 나는 분열증에 걸린 기분이었습니다. 전쟁, 미국의 현실, 세계의 잔혹함이 실린 잡지를 집에 앉아 읽고 좌절과 분노에 빠져 있다가, 다시 화실로 돌아가 빨강을 파랑으로 바꿔 칠하는 나는 대체 어떤 남자일까요?”

이 배신자가 2020년대에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미술관 전시가 이어지고, 아트페어에선 ‘왕’이 됐습니다. 하우저앤워스의 대표작가로 지난 12월, 아트바젤 마이애미비치에서는 페어의 최고가인 무려 2000만달러(약 260억원)의 ‘밤의 화가’가 첫 날 팔리며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밤의 화가’는 고독한 밤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자화상입니다. 담배와 알전구, 핏처럼 붉은 물감덩어리 등 대표작 도상이 포함됐죠.

338억원에 팔린 추상표현주의 시절의 1958년작 ‘To Fellini’ [크리스티]
2013년 5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2588만달러(338억원)의 기록을 쓴 ‘To Fellini’와 두 작품을 비교하면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열렬한 영화광으로 그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풍성한 이야기에서 위안을 찾곤 했습니다. 이탈리아 화가도 가장 좋아해 마사초, 조르조 데 키리코 등을 천국에서 만나고 싶다고 할 정도였죠.

홀로코스트와 전쟁 등 비극으로 점철된 그의 생애를 돌아본다면, 그의 변절에 비난할 수 없습니다. 거스턴은 1913년 캐나다 몬트리올의 유대계 우크라이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1세 때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한 끔찍한 기억, 17세 때 교통 사고로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형의 사망 등은 그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영향이 보이는 17세 때 작품 ‘엄마와 아이’ [Hauser&Wirth]
멕시코에서 그린 벽화의 영향이 보이는 1945년작 ‘If this be not I’ [Hauser&Wirth]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라면서 온전히 독학으로 그림에 빠져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응원 속에 전구가 달린 옷장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17세때 작품 ‘엄마와 아이’를 보면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졌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퇴학을 당한 LA 마누엘예술고교 동급생 중엔 잭슨 폴록도 있었죠. 젊은 시절 거스틴은 파시즘과 폭력에 저항하는 멕시코의 벽화가들의 열정에 크게 매료되어 젊은 화가들과 벽화를 그리기도 합니다. 이 때 프리다 칼라와 디에고 리베라 부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1940년대 미국 중서부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If this be not I’ 같은 초상화를 비롯해 알레고리에 집중한 유화를 그렸습니다. 이후 뉴욕시대는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는 ‘뉴욕 스쿨’로 불리는 추상표현주의 동료들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유럽의 영향이 보이는 추상을 발전시켰습니다. 초기엔 클로드 모네와 피에트 몬드리안의 영향으로 수평과 수직의 격자 무늬가 드러나다, 점차 대담한 색채와 색면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다 트라우마가 점차 드러나며 심연(深淵)과도 같은 어두운 구멍이 특징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침울해지는 이 시기엔 유럽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 장 폴 사르트르 등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966년 돌연 사라졌던 그는 뉴욕주 우드스탁에 정착해 2년의 공백을 뒤로하고 돌연 구상화를 들고 나타납니다. 이 시기 밥 딜런, 필립 로스 등과 해방의 예술에 관한 우정을 나눴죠. 후기에 거스턴은 홀로코스트, 가족의 죽음, KKK(백인우월주의단체)단의 만행, 알전구, 담배 등으로 암울한 소재를 만화처럼 단순하고 낙관적인 구상화로 열정적으로 선보입니다. 목을 맨 아버지의 밧줄과 전쟁터의 못박힌 군화 등 끔찍한 기억은 화폭으로 소환됩니다. 화가 자신은 눈꺼풀이 없어 눈을 감을 수 없는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Cyclopes)로 묘사되죠. 그는 불편한 현실을 직시한 화가였습니다.

동료와 비평가들은 유치한 그림을 두고 ‘미쳤다’고 비난했지만 1980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어두운 구상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그의 사망 3주 전에 열린 순회 회고전 이후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오해하는 이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저는 사람이 진정으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은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술병, 발말굽 등은 그의 대표적 모티프다. 1977년작 ‘Legend’ [Hauser&Wirth]
KKK단의 두건을 두른 남자를 그린 1968-69년작 ‘무제’ [Hauser&Wirth]
사후에도 여전히 거스턴은 논란의 화가입니다. 2020년 ‘Black Lives Matter’ 흑인 인권 운동이 확산되면서 워싱턴 국립미술관은 예정된 거스턴의 회고전을 4년 뒤로 연기했습니다. 하얀 두건을 쓴 KKK 그림 때문입니다. 인종주의를 혐오한 비판의식이 담긴 담긴 상징이지만, 미술관은 대중의 오독을 우려해 전시를 연기하면서 예술가의 서명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2023년에야 ‘지금 필립 거스턴(Phillip Guston Now)’ 전시는 보스턴과 휴스턴을 거쳐 워싱턴에 입성했습니다. 전시는 2월말까지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에서 열립니다. 2022년 펭귄 클래식에서 나온 그의 전기 제목은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걸 그린다(I Paint What I Want to See)’입니다. 평생 타협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그린 화가. 그에게 구상과 추상이란 구획짓기는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습작 드로잉 앞에 앉아 있는 필립 거스턴 [Hauser&W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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