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zine] 갑진년! 최고의 해가 될 거야 ①
(여수=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겨울 새벽, 남해 제일 관음기도 도량인 향일암을 향해 불자와 관광객들이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른다. 장엄하고 순결한 새 날 새 해를 정성을 다해 맞기 위해서다.
푸른 남해 수평선이 주홍빛으로 물들더니 구름 위로 붉고 커다란 태양이 솟구쳐 올랐다.
떠오른 해 앞으로 작은 어선이 천천히 지나간다. 산사의 객들은 해를 향해 간절한 소망들을 조용히 되뇌었다.
가족건강 소원성취 학업성취 사업번창 좋은인연 속득쾌차 업장소멸 시험합격 결혼성취 득남득녀 직장승진 만사형통 가족화합 취업성취 무사고 운전. 삼성각 앞에 쓰여 있는 발원들이다.
어느 하나 절실하지 않은 바람이 없다.
여수 향일암에서 맞는 웅대한 일출처럼 2024년 갑진년이 모두에게 최고의 해가 되길 기원한다.
해를 향한 향일암…선택받은 일출 명소
여수 돌산읍 금오산의 깎아지른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향일암은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함께 '4대 관음성지'로 꼽힌다.
불교에서 관음성지란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으로, 소원을 빌면 그 어느 곳보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도움)를 잘 받는다는 믿음의 장소이다.
향일암은 '해를 향한 암자'라는 뜻의 이름처럼 탁월한 일출 명소로 통한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바라보는 앉음새이다.
암자와 수평선 사이에 장애물이 없어 동해에서 맞는 일출처럼 해가 크게 보인다.
바닷가 벼랑 위에 자리한 까닭에 전국 사찰 중 해를 가장 가까이 맞을 수 있는 곳 중 하나이다.
향일암에는 수백 년은 족히 됐을 법한 동백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아열대 식물이 울창하다.
암녹색으로 싱싱하게 빛나는 동백 잎들은 육중한 기암괴석들과 어우러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대한 바위를 등지고 있거나 굵은 노거수에 둘러싸인, 크지 않은 전각들이 정겹고 고색창연한 아늑함을 풍긴다.
불자가 아닌 관광객이라면 이른바 '기도발' 센 관음성지라는 사실보다 향일암이 내뿜는 자연적인 아름다움에 더 주목할 것 같았다.
승복의 색처럼 중후한 바위들이 기도하는 선승처럼 좁은 경내 곳곳에 우뚝우뚝 솟은 광경은 돌로 건축한 서양 수도원을 연상시켰다.
프랑스 노르망디 바닷가에 위치한 몽생미셸 사원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향일암의 수행처는 절벽 위 좁은 공간, 거대한 바위 사이 사이를 비집고 겨우 자리를 잡은 듯 보인다.
이곳의 주인공은 전각들이 아니라 울창한 숲과 나무, 바위들 같았다.
바닷속 용궁으로 향하는 거북 모양의 금오산
돌산도 끝자락에 있는 향일암은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원통암이란 이름으로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오암, 영구암 등으로 불리다가 해돋이가 아름다워 향일암으로 명명됐다. '금오' '영구'라는 이름은 '거북'의 뜻을 담고 있다.
향일암을 품고 있는 금오산이 용궁을 향해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금거북 모양 같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들이다.
암자에서 내려다보면 거북 머리와 바다를 향해 내딛는 거북 왼발 모양의 땅이 보인다.
이 설화에서 향일암은 거북 등에 실린 부처의 가르침 혹은 경전으로 간주된다.
대웅보전 뒤로 두꺼운 책 형상의 바위가 보인다.
해수관음전 앞 일출 마당에는 원효대사가 참선하던 자리라고 하는 좌선대가 참배객들을 반긴다.
금오산의 크고 작은 바위, 향일암 주변 기암괴석 표면에는 오각형, 육각형 문양이나 글자처럼 보이는 추상적 무늬가 많다.
거북 등 껍질이 연상된다.
향일암의 신비를 더하는 자연현상이다.
용암이 냉각될 때 체적이 줄어 생긴 주상절리라고 한다.
투물러스라는 화산암 지대에서 주로 생성된다.
향일암에는 큰 바위들이 '시옷'(ㅅ)자 모양으로 포개져 생긴 좁은 통로가 7개나 된다.
석문, 바위 동굴 등으로 불린다. 이 바위틈들을 지나가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사찰로 들어가는 산문 중 하나인 해탈문도 자연 석문이었다.
향일암은 금오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와 연결돼 있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30여 분 숨차게 올라가면 남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이른다.
동쪽으로 남해군, 통영의 섬들이, 서쪽으로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고흥군이 보인다.
남쪽으로는 걷기 여행길인 '비렁길'로 유명한 금오도, 안도, 연도가 자리 잡고 있다.
금오도도 거북섬이라는 뜻이 이름에 담겨 있다.
금오산과 금오도는 헷갈리기 쉬운데, 별개 장소이다. 금오산은 남쪽으로 경사가 급하고 해안은 절벽이다.
산 전체와 향일암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금오산에는 그리 험하지 않은 등산로가 있다. 향일암에서 1∼2시간이면 가뿐하게 왕복할 수 있다.
금오산 정상에 서니 평화로운 남해가 새삼 경이로웠다.
향일암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은 숨가쁘다.
도로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돌계단의 경사도는 40도에 가깝다.
부처님을 뵈러 가는 길이 쉽지 않으므로 한 걸음 한 걸음 정진하라는 뜻인가 싶다.
계단 중간에 '불견' '불이' '불언'이라고 새겨진 작은 돌을 앞에 둔 귀여운 동자상들이 서 있었다.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고 나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법구경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도로 양옆에는 여수 명물인 돌산 갓김치를 파는 음식점이 즐비했다.
돌산갓은 독특한 향이 있으며 일반 갓보다 톡 쏘는 매운맛과 섬유질이 적다.
대신 단백질 함량이 높다.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드문 돌산에서 짭짤한 해풍과 황토가 키워낸 갓은 아삭거리는 식감이 뛰어나다.
돌산갓은 봄동 갓, 여름의 김치 갓, 겨울의 김장 갓으로 나뉜다.
봄동 갓이 가장 맛있는데 일반 갓보다 가격이 3배 정도 비싸다.
재배 방법과 계절에 따라 맛이 다른 게 돌산갓이다.
너의 개성을 도전의 밑천으로
광범위한 대중이 좋아하는 화풍인 인상주의는 19세기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의 그림 '인상, 해돋이'에서 시작됐다.
프랑스 르아브르 항구 앞 바다의 일출을 모네는 관습적인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받은 인상대로 그렸다.
빠른 붓질로 아무렇게나 그린 듯한 이 그림은 화단의 혹평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에 따라 달라지는 대상의 순간적인 모습을 포착한 이 그림은 인상주의라는 위대한 미술 사조를 탄생시켰다.
새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선 당신의 인상은 무엇인가.
자신의 시각, 개성을 긍정하고 이를 도전의 밑천으로 삼는 것은 성공으로 가는 열쇠일 수 있다.
김숙연 여수시 문화관광해설사는 "기도로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며 "다만 자신이 해야 할 몫을 다했을 때 관세음보살께서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주신다"고 강조했다.
세속적이고 단순하지 않은 소원이 있을까.
기도의 본질은 자신을 향한 다짐이자, 행동 의지의 발로이지 싶다.
새해에는 간절히 기도해야겠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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