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부른 ‘그림자은행’과 금융안전망의 진화

한겨레 2024. 1. 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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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리포트] 임일섭의 화폐를 다시 생각하다
게티이미지뱅크

1960년대초 미국 대통령 자문기구인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월터 헬러는 경제학자들은 실제 존재하는 제도가 이론적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려는 목적이 아닌, 이미 존재하는 제도에 대한 사후 설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우리가 이미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작동원리나 존재이유를 잘 알지 못하는 제도들이 종종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 제도가 의식적인 설계나 고안의 산물이 아니라, 진화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형성된 경우에 그럴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금융위기 전의 금융안전망

화폐와 은행이 바로 그런 경우다. 현대의 이중통화제도, 즉 공공화폐와 민간화폐가 공존하는 통화제도는 우리가 만든 제도이지만, 의식적인 고안의 산물은 아니다. 민간은행의 예금(민간화폐)이 지급수단으로 쓰이고, 중앙은행의 준비금(공공화폐)이 결제자산으로 사용되는 이 제도는, 근대 이후 태동한 은행업이 수백년에 걸쳐 진화한 결과물일 뿐이다.

화폐제도의 진화과정에 대한 탐구를 통해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다. 근대 초기의 금보관업자, 환전상 등을 모태로 성장한 은행들은 각자 은행권을 발행해 화폐로 유통하였으나, 민간기업의 채무증서인 개별 은행권들은 불완전한 화폐였다. 액면가가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고, 부도가 나서 휴지조각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은행에 대한 자본규제 등도 시행되었으나 한계가 있었다. 시행착오를 거쳐 찾아낸 해결책은 남다른 특권적 지위를 갖는 은행, 즉 중앙은행의 설립이었다.

중앙은행 설립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 민간은행들 중에 정부와 관계가 밀접했던 은행의 특권이 점차 강화되면서 중앙은행으로 성장하는 점진적인 방식이 그 중 하나다. 또다른 하나는 정부에 의해 새롭게 창설된 기구가 중앙은행으로 제도화되는 방식이다. 어느 방식이든 간에 본질은 같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중앙은행 화폐가 민간은행들간의 거래를 최종 정산하는 데 쓰이도록 했다.

이와 더불어 민간은행의 은행권 발행은 사실상 금지됐는데, 문제는 이를 전후로 민간은행의 부채가 은행권에서 요구불예금이라는 형태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부채의 형태가 변했을 뿐 장기자산과 단기부채간의 만기 불일치에 따른 고유한 불안정성은 지속됐으며, 이는 빈번한 패닉과 뱅크런으로 나타났다. 중앙은행 설립과 더불어 현대적인 의미의 지급결제제도가 확립되었지만, 뱅크런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은행의 단기부채(예금)에 대한 공적 지급보증을 제공하는 예금보험제도가 미국에서 1933년 최초로 설립됐고, 이후 뱅크런은 진정됐다. 중앙은행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미흡했기에 뱅크런을 막지 못했던 것인지, 예금보험은 그 취약점을 어떻게 보완하고 있는지 충분히 설명된 바는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중앙은행과 예금보험이라는 금융안전망이 확립된 이후에 은행이 한층 안전해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진화과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현대의 통화제도는 민간은행과 공적 기관들간의 협력을 통해 작동한다. 대출을 통한 예금화폐의 발행은 민간은행의 중요한 역할이지만, 이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공적 기구의 지원과 보증이 필수적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은행업 면허가 단순 신고제가 아닌 허가제 형태로 운영되는 이유, 그리고 은행이 남다른 규제와 감독을 받는 이유도 이런 맥락이다. 즉 은행업 면허는 민간화폐의 창조 권한을 의미하며, 화폐창조라는 중요한 기능에는 공적 지원과 보호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림자은행의 등장과 대응

시간이 흐르면서 법적으로는 은행이 아니지만, 경제적으로는 은행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금융기관들이 생겨났다. 은행과 유사하게 단기부채와 장기자산의 결합을 통해 금융기관들이 주로 사용하는 준화폐(RP, CP 등)를 만들어내는 비은행금융기관들의 등장이다. 이들은 은행법의 외부에서 은행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그림자은행이라고 불린다.

미국 예일대학의 개리 고튼 교수를 위시한 다수의 경제학자들은 2007-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그림자은행 부문에서의 패닉과 런(Run)으로 설명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기초자산으로 한 증권화상품에 대한 투자가 RP, CP 등의 단기자금으로 조달됐는데, 주택가격의 하락과 더불어 모기지에 기반한 증권화상품들의 부실화 우려가 높아지면서 단기자금시장에서 패닉과 런이 발생한 것이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설명이다.

중앙은행과 예금보험 등 전통적 금융안전망은 은행 예금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제도다. 원칙적으로 비은행금융기관은 중앙은행의 최종대부 대상이 아니며, 예금보험의 지급보증도 제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위기 당시 미 연준과 연방예보가 발동한 예외적 비상조치들은 대부분 은행을 대상으로 하던 전통적 대응조치들, 즉 대출과 지급보증 등을 비은행금융기관으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미 연준법과 연방예금보험법의 예외조항에 대한 적극적 해석을 활용한 당국의 대응은 위기의 진화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이후 여러 논란을 낳았다. 본래 중앙은행과 예금보험 등의 전통적 금융안전망은 민간은행의 화폐 창조를 지원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법적으로는 은행이 아닌 금융기관, 따라서 법적으로는 화폐창조 권한이 없는 비은행금융기관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창조한 준화폐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한 비상조치들을 시행했으니 논란은 불가피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은행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기관을 은행과 유사한 방식으로 지원하고 보호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은행 면허 없이 사실상의 은행업을 영위하다가 사고가 난 것이므로 지원과 보호는커녕 강력한 규제와 재발 방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시각도 가능하다. 요컨대 법적인 의미에서 화폐창조 권한이 없는 그림자은행의 행위를 지원하고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금지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합의된 답변은 아직은 없다.

위기 이후 미국의 금융개혁은 이에 대한 혼란과 동요를 반영하고 있다. 2010년 제정된 도드-프랭크법은 한편으로는 비은행금융기관에 대한 자금지원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은행금융기관에 대한 안전망을 확대했다. 우선, 비은행금융기관을 대상으로 한 연준과 연방예보의 자금지원 및 지급보증 요건이 더욱 강화되었다. 화폐창조 권한이 없는 금융기관의 사실상의 화폐창조 행위에 대한 지원과 보호는, 그것이 필요하더라도 매우 예외적으로만 이뤄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지원요건을 더욱 엄격하게 만드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림자은행 성장이 야기한 현실적 문제들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이는 부실화된 대형 비은행금융기관들의 정리권한(Orderly Liquidation Authority: OLA)을 연방예보에 부여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어떤 화폐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요구불예금의 성장은 은행권 발행규제를 회피하기 위한 민간은행들의 전략의 산물이었지만, 동시에 은행권 발행만으로는 당시의 화폐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그림자은행의 성장은, 규제차익을 향유하고자 하는 비은행금융기관들의 전략의 산물이었지만, 동시에 전통적 은행부문이 경제 내의 화폐수요를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했던 탓일 수 있다. 그렇다면 19세기의 그림자금융이었던 은행의 요구불예금이 예금보험제도를 통해 공적인 금융안전망으로 편입됐던 것처럼, 20세기의 그림자금융도 언젠가는 공적 안전망의 대상으로 편입될 수도 있다. 최근 우리 국회에서 논의중인 ‘금융안정계정’ 도입안은 이런 문제의식의 반영이다.

시장의 변화가 제도 변화로 이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특히 시장의 변화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점진적 진화의 산물인 경우에는 그 변화의 의미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데 더욱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이 요구불예금에 대한 최초의 패닉을 경험한 이후, 전국적 단위의 예금보험제도를 도입하기까지는 무려 77년이 걸렸다. 새로운 민간화폐로서의 요구불예금을 이해하는데 그만큼 시간이 필요했다. 반면 글로벌 금융위기, 즉 그림자은행에서의 패닉으로 인한 금융위기를 겪은 지는 불과 1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림자은행에 대해, 월터 헬러가 말한 경제학자의 ‘이론적 설명’은 아직 미흡하다. 결국 화폐제도의 진화, 즉 민간화폐의 형태 변화 과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방식이 향후 금융안전망의 변화를 결정할 것이다.

(위 내용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필자가 소속된 기관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임일섭 |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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