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순아, 피눈물 흘리며 1·4 이후 나 홀로 왔다"[뉴스속오늘]

양성희 기자 2024. 1. 4.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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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

━이산가족 사연 절절임시 수도 부산의 변화 ━1·4 후퇴가 더욱 안타까운 건 이를 기점으로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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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4일, 서울이 텅 빈 '1·4후퇴'…하루아침에 가족과 생이별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50년 7월, 전선으로 향하는 군인의 행렬과 이를 피해 떠나는 피란민의 행렬이 서로 엇갈린 모습./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

1951년 1월4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텅 비었다. 옹기종기 모여살던 가족들은 황급하게 서울을 빠져나오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하루아침에 생이별하면서 찾지 못한 '금순이' 생각에 눈물로 살아간 이들은 일일이 셀 수도 없다.

6·25전쟁(한국전쟁)이 한창이던 73년 전 오늘, '1·4후퇴'를 피하지 못하면서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중국공산군의 개입으로 서울에서 퇴각한 사건을 가리킨다. 정부가 장악된 서울을 떠나 저멀리 부산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수많은 난민과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1·4후퇴 전후 뺏고 뺏긴 수도…결국 유일한 분단국가로
한국전쟁은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됐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순식간에 남하했다.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앞세운 유엔군이 반격에 나섰다. 낙동강에 방어선을 치고 남진을 막은 데 이어 그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엔 서울을 탈환한 데 이어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10월 평양을 점령했고 북한군은 이대로 패퇴하는 듯 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전쟁은 장기전이 됐다.

해가 바뀐 1951년 1월 초, 중공군 공세에 국군과 유엔군은 즉시 서울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인해전술에 밀려 서울을 방어하지 못했다.

이에 앞서서는 압록강·두만강선에서 후퇴했는데 점점 밀려 수도 서울까지 내려온 것이다. 1월4일 서울은 중공군에 함락됐고 한국정부는 부산으로 철수했다. 서울을 다시 찾은 건 2개월 뒤인 그해 3월이다.

이후 진격과 퇴각을 반복하다가 1953년 휴전협정을 맺으며 일단락 됐다. 이로써 한반도는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았다.

1951년 3월,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잃고 길을 나선 피란민 가족./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이산가족 사연 절절…임시 수도 부산의 변화
1·4 후퇴가 더욱 안타까운 건 이를 기점으로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나서다. 서울 집을 잠시만 떠난다는 생각에 어린 자식을 친척집에 맡기고 몸을 피하거나 가족 중 몇명만 짐을 싸는 경우가 많았다. 거동이 불편한 가족을 어쩔 수 없이 남겨두고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KBS에서 특별 생방송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에서도 1·4 후퇴 때 생이별한 사연이 많이 소개됐다. 영등포에서 탄 기차가 '이별 열차'가 된 줄 모르고 살았던 남매의 사연 등이 시청자들을 울렸다.

1·4 후퇴 생이별을 그린 가요도 많은 이들을 눈물 짓게 했다. 가수 현인이 생이별한 여동생 금순이에게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굳세게 살아달라'고 당부하는 '굳세어라 금순아'가 대표적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남북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등 절절한 가사가 이산가족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했다.

1·4 후퇴는 지금의 대도시 부산을 만든 면도 있다. 정부가 부산으로 철수하면서 부산 소재 옛 경상남도청을 임시 정부청사로 사용했고 부산으로 70만명에 이르는 피란민이 유입됐다.

당시엔 물과 식량이 부족하고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했지만 전쟁 속에서 부산은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예술가들이 집결해 전쟁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희망을 그려내기도 했다.

양성희 기자 ya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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