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먹던 성소수자가 신인상...'유재석 빠진' 방송권력의 지각변동
4년 만에 대상 수상 안 한 유재석...비연예인이 차지
성소수자, 최초 신인상...'중년 남성' 중심 권력에 균열
잡음 없는 새 얼굴 발굴, 문화다양성 확보...지상파 숙제
지난 연말 치러진 지상파 방송 3사 연예대상의 대상 시상에 '단골'로 통하던 유재석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불리지 않았다. 그 빈자리를 차지한 건 연예인이 아닌 기안84(MBC 대상 수상)였다. 비연예인이 지상파 3사 연예대상에서 홀로 대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변은 이어졌다. 트랜스젠더 여성인 풍자는 성소수자 최초로 신인상(MBC)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것도 여자신인상. 중년 남성에게 집중됐던 대중문화 속 TV 권력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시상식으로 본 방송가의 변화다.
'대상 단골' 유재석이 사라졌다
지난달 29일 방송된 MBC '2023 방송연예대상'에서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는 '올해의 예능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 촬영에 동행하는 제작진을 대폭 줄여 개입을 최소화하는 대신 출연자들에게 카메라를 들려줘 리얼리티를 극대화한 게 이 프로그램의 특징. 제작진은 기성 연예인이 아닌 기안84와 덱스, 빠니보틀 등 인기 유튜버를 주축으로 출연진을 꾸렸다. 이들은 인도 사람들이 목욕하고 빨래도 하는 갠지스강에 웃통 벗고 뛰어들고, 마다가스카르에서 작살을 들고 바다에서 직접 물고기를 잡았다. 유튜브 여행 콘텐츠 같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은 유튜브에 친숙한 10~30대를 끌어모았다.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가 시청자 투표로 올해의 예능프로그램에 선정된 배경이다.
'국민 MC' 유재석이 이끄는 '놀면 뭐하니?' 대신 시청자들이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를 택한 것은 일부 스타 MC 중심으로 굴러가는 TV 예능 프로그램들에 대한 시청자의 반감이 커진 데 따른 여파로 해석된다. 지난해 지상파 3사 방송연예대상 대상 수상자 명단엔 유재석뿐 아니라 강호동, 신동엽의 이름도 없었다. 유재석이 연예대상에서 대상 트로피를 손에 쥐지 못한 건 4년 만에 처음이다. 이는 "오랫동안 유지돼 온 스타 MC 권력이 무너지고"(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유튜브 등 새로운 플랫폼에서 등장한 새 얼굴들이 TV에 유입되면서 방송 제작 문법이 바뀌는 과도기"(공희정 대중문화평론가)의 신호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왜 나보다 잘 살아?" 혐오 딛고 조명받은 풍자
풍자는 풍진 세상을 해학으로 달래며 그 변화의 중심에 섰다. "여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병무청에 낼 초중고 생활기록부를 떼기 위해 학교 행정실에 갔더니 '본인 외엔 발급이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는 자학으로 웃음을 주면서도, 취객이 지나가다 트랜스젠더인 그의 몸을 더듬었을 때 "엔간히 하자"며 욕을 퍼부은 '마라맛 사연'으로 시청자의 혼을 쏙 빼놨다. 비주류인 그가 MBC '혓바닥 종합격투기 세치혀'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들려주는, 주류로부터 폭력을 당한 경험은 어떤 '풍자'보다 매서웠다.
2016년 아프리카TV 진행자로 '별풍선'을 많이 받기 위해 예명을 풍자로 지은 그가 늘 당당함으로 주목받은 건 아니다. 방송에 나오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의 휴대전화엔 익명으로 보낸 욕이 쌓였다. 인신공격은 기본. 가족 욕까지 듣다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그는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가해자를 잡고 나니 돌아온 말은 "너 트랜스젠더잖아. 근데 왜 나보다 잘 살고 웃으면서 살아?"라는 반문이었다. 혐오를 딛고 일어선 그는 자존감이 낮은 스태프의 기를 살려주며(MBC '전지적 참견 시점) 약자를 챙겼다. 주류 미디어에서 배척당하기 일쑤였던 트랜스젠더 여성은 그렇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여자 신인상을 받았다. 풍자의 수상은 견고했던 TV의 가부장적 세계관에 균열을 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진보당 인권위원회는 1일 논평을 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곁엔 성소수자를 비롯해 다양한 인종,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며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과 배제를 넘어 대중의 애정과 포용 위에 이뤄진 수상이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고 풍자의 수상을 축하했다. 시상식에서 풍자는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설움이 있을까, 배제당할까 걱정하시는 아버지께 '저 이렇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하며 눈물을 쏟았다.
평균 나이 47세, 새 얼굴 발굴 잡음 이유
낡은 TV 예능 프로그램 변화를 위해 MBC가 중용한 기안84는 대상을 받으면서 새 방송 권력으로 떠올랐다. 그가 틀에 박히지 않은 모습으로 TV 예능 프로그램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MBC가 '문제적 인물'을 키운 게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기안84가 웹툰 '복학왕' 등을 통해 여성·장애인 비하 논란을 빚은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구설에 오른 인물을 MBC가 끌어안은 것은 지상파 방송사의 신인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KBS는 지난해 5년 만에 신인 코미디언을 선발했지만, MBC와 SBS에선 그 명맥이 5년 넘게 뚝 끊겼다. 방송사 '밖'(유튜브)의 인력에만 기대다 보니 그 과정에서 잡음이 일고 TV에서 '청년 공동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SBS '연예대상'에서 '올해의 프로그램상'을 받은 '런닝맨'은 지석진, 유재석, 김종국 등 여섯 출연자의 평균 나이가 47세다. 10, 20대 시청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의 아이러니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위원은 "지상파 방송이 고민해야 하는 건 콘텐츠의 문화다양성 확보"라며 "성적 지향뿐 아니라 나이 등이 다양한 문화적 교류의 공간을 꾸준히 만들어 청년 세대를 불러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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