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포기하고, 앞으로”…승무원은 침착했고 승객은 안내 따랐다
지난 2일 오후 일본 도쿄 하네다공항 활주로에서 해상보안청 항공기와 충돌, 기체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일본항공(JAL) 516편 여객기에서 탑승자 379명은 전원 탈출에 성공했다. 불길은 8시간 30분 만에야 잡혔고 비행기는 모기향처럼 재로 변했다. 해상보안청 항공기 탑승자 6명 중 5명이 사망했지만, 여객기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비결로는 ‘90초 룰’이 지목된다. 사고 등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90초 안에 모든 승객들을 기내에서 탈출시켜야 한다는 규정이다. ‘90초 룰’은 이번 사고에서 어떻게 수백 명의 생명을 구했을까. 일본 언론과 목격자 증언 등을 토대로 JAL516의 충돌부터 승객 전원 탈출까지의 순간순간을 재구성했다.
이날 오후 5시 47분 일본 홋카이도 신치토세를 출발해 도쿄 하네다공항에 착륙해 활주로에서 감속하려던 JAL 여객기(에어버스 A350)이 무언가와 충돌해 덜컹거렸다. 비행기가 멈추기도 전에 비행기 날개 후미(後尾)에 불이 붙어 번지기 시작했다. ANN 등이 보도한 사고 당시 기내 영상에 따르면, 충돌 직후 승객 가운데 “빨리 내보내달라”는 고성이 일부 나왔지만 대부분 자리에 앉아 승무원 안내를 기다렸다.
사고 이후 몇 초 내에 기내는 검은 연기로 가득해졌다. 승무원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충돌로 기내 안내 방송 시스템이 고장 나 기장의 안내는 나오지 않았다. 여객기는 속도를 줄였고 1㎞쯤 지나 활주로에 완전히 멈췄다. 수 분 정도 걸렸다고 추정된다.
비행기가 멈춤과 동시에 JAL 승무원 12명이 ‘90초 룰’을 가동했다. 안내 방송이 고장 났기에 승무원들의 육성(肉聲)이 이를 대신했다. 일부 승무원은 기내에 이런 상황을 대비해 준비돼 있던 확성기를 손에 들었다. “진정하고 앞으로 이동하세요. 차례대로 움직이세요.” 미리 연습해둔 문구들이었다. 비행기 뒤쪽에 불이 붙어 앞으로 번지는 상황이었기에 승객을 앞으로 보낸 것이다. 확성기가 없는 승무원은 고함을 치면서 “손짓발짓으로 탑승객을 안내했다”(교도통신)고 한다.
승무원들은 탑승객을 앞으로 유도하면서 “선반을 건들지 말라. 짐을 버리고 가라”고 반복해서 안내했다. 귀중품 등을 선반에 보관했다면, 미련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승객 중 한 명이 멈추어 선반을 여는 순간 그 뒤에 있는 이들의 탈출이 지체되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도쿄 오타구에 거주하는 47세 여성은 “기체가 멈추자마자 승객들이 일제히 전방으로 향해 탈출 슈터를 타고 빠져나왔다”며 “선반에서 짐을 꺼내려는 이들이 일부 있었지만 승무원이 버리라고 제지했다. 나 역시 돈도 집 열쇠도 모두 두고 나왔지만 생명을 지켜 기쁘다”고 요미우리신문에 말했다.
승객들이 짐을 포기하고 이동하는 사이 승무원들은 불길이 아직 닿지 않은 기체 전방 우측 등 비상 출입구 셋을 열고 탈출 슈터(항공기 비상 출입구에 부착된 가스 주입형 미끄럼틀)를 폈다. 이 과정에 15명이 화상·타박상 등을 입었지만 모두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고 아사히신문이 전했다. 불길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승객들은 서로를 밀치거나 다투지 않고 차례로 탈출 슈터를 통해 비행기에서 나와 땅에 닿았다.
모두가 탈출한 시간은 오후 6시 5분이었다. 충돌 후 감속-정지-탈출이 18분 만에 이뤄진 셈이다. 감속에서 정지까지 걸린 시간이 공개되지 않아 비행기 정지 후 탈출까지, 90초 안에 이뤄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본 언론들은 탑승객들의 증언을 인용해 모든 탑승객이 내릴 때까지 5분 정도가 걸렸을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는 ‘90초’에 비해 긴 시간일 수 있지만 400명에 육박하는 인원을 고려하면 매우 짧고, 이것이야말로 승무원들이 평소 ‘90초 룰’에 따른 훈련을 철저히 받아온 결과물이라고 CNN 등 외신은 보도했다.
이날 기내 뒤쪽에 앉았다는 49세 남성은 요미우리신문에 “단 1분만 늦었더라도 어떻게 될지 모를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삿포로 친정에 들렀다가 도쿄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승객 이마이 야스토(63)씨는 지지통신 인터뷰에서 “우는 아이와 큰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승무원들의 침착하고 정확한 안내에 곧장 안정을 되찾고 대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CNN은 ‘90초 룰’을 ‘피로 쓰인 안전 수칙’이라고 표현했다. 1960년대 처음 만들어진 이 규정이 여러 사고를 경험하며 보다 정교하게 진화했다는 것이다. CNN은 “1980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비상착륙을 하고도 안내 방송 시스템으로 조종사가 승객을 탈출시키지 못해 탑승자 301명이 연기 흡입으로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 사건 이후 이번처럼 승무원들이 육성과 확성기로 탈출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일본항공은 약 40년 전 참사를 계기로 특히 엄격한 안전 훈련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85년 8월 도쿄에서 오사카로 향하는 JAL123편이 추락해 탑승객 524명 중 520명이 사망하는 비극 이후 일본항공은 ‘90초 룰’을 철저히 연습해 왔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이 참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직원이 늘자, 2005년부터 본사 건물에 사고 잔해와 당시의 증언을 전시해두고 직원들이 경각심을 잃지 않도록 하고 있다.
☞90초 룰
항공기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모든 승객이 90초 안에 탈출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는 항공 업계 규정. 1967년 미 연방 항공국(FAA)이 항공기 제조사들에 요청한 것이 시초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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