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부터 현대까지 주석 비교, 사기열전 낸 50대 직장인
“국내에 이런 주석본은 나온 적이 없습니다. ‘사기열전(史記列傳)’을 더 깊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꼭 찾아서 읽을 겁니다.”
최근 출간된 새 ‘사기열전’(글항아리) 완역본은 상·하 두 권 2000여 쪽 분량이다. 사기열전 번역본은 여러 차례 나왔지만, 이번엔 본문 분량에 육박하는 방대하고 자세한 주석이 눈에 띈다. 그런데 번역자 송도진(59)씨는 학계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사실 그는 학자가 아니라 직장인이다. 현재 경기 김포 한 전자 부품 기업의 고문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추어가 이런 책을? 사실 그는 ‘재야의 고수(高手)’라 불러야 할 사람이다. “고등학교 시절 박종화 삼국지를 처음 읽고서 동양 고전에 푹 빠졌습니다. 노장(老莊)사상에도 심취했죠.” 그러나 철학과를 가려고 하니 부모님 낯빛이 변하는 걸 보고 할 수 없이 중문과에 진학했다. 한학 대가 김도련(1933~2012) 교수에게서 제대로 한문을 배웠다.
그러다 길거리 간판에서 한자만 봐도 지긋지긋해지는 때가 있었다. 중국 대신 새로 길이 뚫린 러시아 유학을 떠났다. 1996년 귀국해서 러시아와 기술 교류를 추진하던 기업에 입사했다. 여권에 도장 찍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출장을 다니며 세월이 흘렀다.
나이 쉰 넘어서 회사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전환됐고, 매일 출근할 필요가 없게 됐다. 그 무렵 출판 일을 하는 친구가 ‘동양 고전 편집을 봐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한 25년 만에 한문 책을 펴 드니 처음엔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더 베스트’란 영화에서 20여 년 칼을 들지 않았던 펜싱 고수가 피나는 연습을 통해 서서히 옛 실력을 되찾은 것처럼, 1~2년 원전을 보고 또 보니 예전 감각이 살아났고 마침내 문장이 눈에 들어오게 됐다.
‘수호전’과 ‘삼국지’ 번역을 시작해 먼저 책을 냈고, ‘사기열전’ 주석본 작업에 뛰어들었다. 일주일에 나흘 집에 있으면서 하루 4~5시간씩 자며 일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아주 편안해지더라고요.” 모처럼 집에 있게 된 남편이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으니 아내의 불만이 컸지만, 책이 나온 뒤엔 잔소리가 좀 덜해지더라고 했다.
기원전 1세기 중국 한나라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는 동양 역사학의 정수(精髓)로 불리는 고전이다. 그중에서도 70편에 걸쳐 여러 인물의 장대한 삶을 기록한 부분이 ‘열전’으로 보통 사기열전이라 불린다. 송씨의 번역본은 남북조시대 송나라에서 나온 ‘집해’, 당나라 ‘색은’ ‘정의’의 사기 3대 주석부터 청나라 고증학, 현대의 해석까지 망라해 자세히 소개한 ‘역대 주석 비교본’으로, 동양 고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만하다.
“사마천도 책에서 오류를 많이 냈더라고요. ‘소진 열전’에선 소진의 형을 동생으로 잘못 썼고 ‘회음후 열전’은 사건 순서가 뒤죽박죽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의 주인을 하늘에서 인간으로 바꿔놓은 중요한 책이고, 2000년이 지나도 인간의 기본적인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고 했다.
사기열전의 숱한 인물 중 그가 가장 주목한 사람은 누구일까. “회음후 열전의 주인공인 한신(韓信)입니다. 전쟁의 전투력에 비해 처세의 판단력은 몹시 떨어졌던 인물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우유부단하면 망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그는 지금은 ‘후한서’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지식인 탄압과 권력 쟁투의 원형인 ‘당고(黨錮)의 화(禍)’가 담겨 있는 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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