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부산 춤의 고유성과 이사도라 덩컨
상호 계면성은 예술 속성…지역 춤판 변화 수용해야
이상헌 춤 비평가
얼마 전 지인이 ‘부산 춤의 고유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설명할 여유가 없어서 간단하게 ‘의미 없다’고 답했다. 의아해하던 지인이 이 글을 읽고 이해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모든 면에서 서울 집중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예술도 예외일 수 없다. 서울에서 볼 때 지역은 서울의 문화예술을 소비하는 시장이고, 재능 있는 예술가를 공급하는 인큐베이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부산 무용은 약화 일로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 때문에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먼저 부산 춤의 고유성을 찾아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부산 춤의 활로를 모색하자는 논의가 많이 있었다. 모방하기 어려운 부산만의 고유성을 찾자는 것인데, 형식만의 문제는 아니며, 논의는 진행 중이다. 그런데 부산 춤의 고유성을 찾는 일이 청년 무용가가 기회를 찾아 부산을 떠나는 현실을 개선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될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또한 특정 문화나 예술의 고유성을 밝히는 일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며, 규정하는 순간 문화와 예술을 한정하는 경계로 작동할 수 있다는 면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논의에서 주목받았던 해양성 개방성 역동성 같은 부산 춤의 고유성 개념은 다른 지역 춤에도 대입할 수 있다. 해양성을 가진 춤은 동·서·남해안의 별신굿 춤에서 쉽게 찾을 수 있고, 역동성과 개방성은 거의 모든 춤이 가진 속성이다. 역으로 서울 춤의 고유성에 관해 생각해 보자. 예로부터 서울은 전국의 예술가가 모여드는 곳이었고, 1930년대 한성준이 100여 종의 춤을 집대성하면서 현재 한국 무용의 근간을 만들었다. 전국의 예술가가 서로 통섭하면서 지금의 서울 무용계를 형성했기에 서울 춤의 고유성과 정체성은 규정하기 어렵고, 규정할 필요도 없다. 부산 춤의 역사도 부산에서 추던 춤이 다른 문화나 외래 춤과 상호 작용해서 발생한 변화의 과정이다. 이만큼이 부산 춤이고 나머지는 아니라는 구분이 장르가 뒤섞이는 시대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으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맨발의 무용수로 알려진 이사도라 덩컨은 신체 내에서 각성한 아름다움, 즉 자기가 느낀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한 신체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강조한 무용가였다. 덩컨의 유럽 방문 당시 발레는 15세기 중반 이후부터 규정된 스텝과 동작 및 자세의 질서를 확립하면서 규격화한 형식을 줄곧 따르고 있었다. 1832년 최초의 낭만주의 발레로 간주하는 ‘라실피드’의 충격으로 동작과 의상에 변화가 있었지만, 1903년 이사도라 덩컨의 베를린 방문이 결정적으로 혁신의 계기가 되었다. 안무가 미하일 포킨은 덩컨을 만난 이후 발레 ‘빈사의 백조’를 안무했고, 시인 말라르메와 폴 발레리는 춤과 무용수에 관한 큰 깨우침을 얻는다. 이때부터 이른바 모던댄스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지점은 덩컨의 영향이 독일에서 크게 발휘됐다는 점이다. 당시 독일의 어떤 도시에서도 파리나 런던처럼 틀에 박힌 기교와 형식을 중요시한 무용이 뿌리내린 적이 없어서 덩컨의 무용 철학에 쉽게 감응할 수 있었다. 예술은 예술가 내부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변화 욕구가 다른 예술 장르 및 철학 같은 외부 요인과 결합해 변화하고 확장한다. 예술철학자 이광래는 예술작품에서 진정한 독창성은 기대할 수 없으며, 그 이유는 예술이 ‘상호 계면성(인터페이시즘)’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터페이시즘은 유목 욕망의 표출이고, 다른 것을 더 많이 공유하려는 의지의 실천이다. 규정할 수 없는 자유로움으로 동시대 예술가들과 교류함으로써 디아길레프, 머스 커닝햄, 저드슨 댄스 시어터의 이본 레이너, 루신다 차일즈, 트리샤 브라운에 이르는 현대 무용 흐름의 시작점이 된 덩컨은 인터페이시즘의 상징적 예술가이자 자신이 말 한대로 기성 발레의 적이었으며, 고유성에 갇히기를 거부한 예술가였다.
부산 무용은 사조나 형식을 고유성에 연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형상미술’ 같이 특정 시기 부산에만 있었던 사조에 관해 부산 미술의 고유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부산에서 반복해서 공연하는 살풀이 승무 태평무 같은 춤은 전국에서 똑같이 공연된다. 이런 현실에서 부산 춤의 고유성은 모호한 관념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고유성이 주체를 한정하고 규격화하며 변화와 수용의 가능성을 줄이거나 위계로 작동한다면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 상호 계면성은 예술의 속성이다. 예술은 상호 계면성 과정에서 장점만이 아니라 문제점도 공유한다. 그래서 부산 무용의 문제는 부산 문화 예술계 전체의 문제이며, 부산 예술계가 함께 돈 공간 기회에 관해 솔직하게 말하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 고유성 찾기보다 훨씬 유용하다. 부산 춤판이 누구와도 뒤섞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술이 지속해야 할 명분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삶에 있기 때문이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