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의 지옥불… 장제스는 광복군을 中 참모총장에게 예속시켰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4. 1. 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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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 [18] 중일전쟁 전후의대한민국임시정부

시청률 50% 이상의 경이적 기록을 세우고 해외로도 수출된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이 드라마 속 이승만 대통령은 “나는 주로 미국에 살아서 한문은 잘 몰라요”라고 말한다. 실제 이승만은 한시를 즐겨 쓸 정도로 한문에 능통했다.

이승만은 만주사변 이후 제네바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변하면서 영어는 물론 한문으로 중화민국(현재 대만) 외교관들과 소통했다. 국제연맹 창립 회원국이었던 중화민국 외교관들은 이승만의 소련 방문을 도왔다. 1932년 12월 중화민국은 서둘러 소련과 수교한 상태였다. 소련 외교부로부터 입국 비자를 받은 이승만은 1933년 7월 기차를 타고 소련으로 갔다.

소련 입국 직후 추방당한 이승만

만주를 석권한 일본을 막기 위해 이승만은 중화민국, 소련, 그리고 미국을 묶는 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933년 7월 19일 소련에 도착한 이승만은 다음 날 추방되었다. 마침 일본 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모스크바를 왕복하면서 이승만은 소련의 참상을 보았다. 당시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에서는 3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고 있었다(홀로도모르). 스탈린의 공산주의 정책이 빚어낸 대량 몰살이었다. 당시 소련 혁명의 실상을 현장에서 전달한 존스(Gareth Jones, 1935년 내몽골에서 의문사) 기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서구 유명 지식인들조차 소련 매체 프라우다(진실)가 전하는 가짜 뉴스를 진실로 믿던 시절이었다. 1933년 7월 이승만이 직접 소련을 경험한 것은 이후 대한 독립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주국 수립 이후 일본과 소련의 밀당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소련의 만주국 승인을 압박했다. 당시 소련은 국제연맹 회원국이 아니었고 국내 사정도 절박했다. 일본이 불가침조약만 체결해준다면 만주국을 승인하려 했다. 공산주의 소련과 천황제 일본 사이에 완충국을 두는 것은 양쪽에 매력이 있었다.

일본은 이미 1925년에 소련과 수교했지만 불가침조약에는 미온적이었다. 일찍이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를 파견하여 러시아혁명을 배후에서 부추겼던 일본은 소련의 붕괴 가능성도 엿보고 있었다. 미국과의 최종 결전에 앞서 소련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도 존재했다. 실제로 1939년 일본은 만주국군과 함께 할힌골(노몬한)에서 전쟁을 벌였다. 주코프가 지휘하는 소·몽 연합군에 참패한 일본은 2년 후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한다.

일본과 소련이 만주국 승인을 놓고 협상을 벌이는 동안 장제스 정부는 1932년 12월 12일 재빨리 소련과 수교했다. 장제스 아들 장징궈는 소련 여인과 결혼했다. 반공을 외치던 장제스가 소련과 수교하자 일본은 공산주의를 확산시킬 것이라며 비난했다. 1925년 일·소 수교도 공산주의 전파를 촉진했었다.

1936년의 12·12사건

소련과 수교한 이후에도 장제스의 반공 노선은 확고했다. “일본인들은 피부병, 공산주의자들은 심장병”이라고 보았다.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망국 노예가 되겠지만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하면 노예로조차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장제스는 우선 공산당과의 내전을 끝낸 후에 외세를 물리치고자 했다(先安內 後攘外).

그러나 화베이 지역에까지 자치정부를 세우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국제적 반발을 자아냈다. 화이허(淮河) 이북을 의미하는 화베이는 남몽골에서 베이핑(베이징)을 지나 산둥반도에 이르는 넓은 땅이다. 한반도의 약 10배 크기였다.

만주에서 퇴각해서 장제스 휘하로 들어가 있던 장쉐량은 일본에 투항한 부하들을 제외하고도 약 15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대의를 포기하더라도 인맥을 유지하는 것은 군벌의 오랜 전통이었다.

1936년 12월 12일 지역적 연고도 없던 서북의 시안에서 중국공산당과 싸우는 동시에 내통하던 장쉐량은 격려하러 온 장제스를 감금했다. 난징에 있던 국민정부는 장제스를 희생하더라도 공산당과는 타협하지 않으려 했다.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이 시안으로 날아가 협상을 벌였다. 양측은 일치항일(一致抗日)을 위한 국공합작에 합의했다.

1937년 7월 일제의 자멸적 선택

“전쟁에서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19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1937년 7월 7일에 어울린다. 7월 7일 중화민국과 일본 양측의 군사분계선인 노구교 근처에서 실종된 일본군 병사 한 명을 놓고 양측이 옥신각신했다. 생리 현상을 해결한 병사가 나타났지만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자멸적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만주사변을 주도했던 이시와라 간지조차 중일전쟁에는 반대했다. 덕분에 그는 도쿄전범재판에 기소되지 않았지만 중일전쟁을 막지 못했다. 중화민국도 1936년 12·12사건 이후 합의한 국공합작에 따라 일전불사의 태세였다.

1937년 8월부터 3개월간 상하이전투가 벌어졌다.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중화민국 군대 약 75만 명은 일본군 약 30만 명에 맞서 예상보다 잘 싸웠다. 상하이 외국 조계지들을 통해 중화민국에 유리한 국제 여론도 조성되었다. 간신히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곧이어 중화민국 정부의 수도 난징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다.

단순한 살인과 달리 대학살에는 이념이 동원되곤 한다. ‘덴노(天皇)의 군대’로서 “민간의 탁상시계 하나라도 훔칠 수 없다”던 그 신조가 오히려 대량 학살을 가능하게 했다. ‘성전(聖戰)’의 환상이 개인적 양심의 최후 보루마저 쉽게 무너뜨린 것이다. 십자군전쟁을 선도했던 중세 유럽의 교황도 ‘덴노(天皇)’처럼 현인신(現人神)을 자처하지는 않았었다. 일본의 우파는 물론 좌파 지식인들도 이에 대한 언급은 회피한다.

일본의 돌격에 맞서 장제스 정부는 기꺼이 “할복을 도와주는 도우미(가이샤쿠)”를 자처했다. 일본 해군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내륙의 충칭으로 이동하며 일본 육군을 끌어들였다. 약 500만 명을 투입하여 지구전을 벌이면서 미국과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다.

충칭으로 간 김구

김구는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가 이어진 1932년 말에 이미 장제스를 만났다. 장제스는 “특공을 통해 천황을 암살하면 다른 천황이 또 나올 것이고, 대장을 죽이면 다른 대장이 또 나올 것”이라며 군대를 키우라고 조언했다. 김구와 지청천은 장제스 정부가 운영하는 중앙군관학교를 통해 무관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정은 장제스 정부가 있던 충칭으로 옮겼고, 같은 해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장제스 정부는 돕는 조건으로 9개 준승(따라야 할 기준)을 통해 수백 명의 한국광복군을 중화민국군 참모총장에게 “직예(直隸)”시켰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한민국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 대한민국 임정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자적 기반을 모색했다. 한인들이 많았던 만주가 일본에 장악된 상황에서 소련의 고려인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소련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대숙청에 이은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로 참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무엇보다 1941년 4월 일·소 중립조약으로 일본에 대한 적대 행위 자체가 금지되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 시절부터 대한민국 임정을 후원했던 구미 동포들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다. 김구는 미국의 이승만과 계속 소통하며 장제스 정부를 지원하던 미국으로부터 직접 지원을 받아내고자 했다. 이승만도 점차 외교독립 노선에서 독립전쟁 노선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 공습으로 또 한 번의 자멸적 선택을 했다. 이승만이 ‘Japan Inside Out’ 등에서 예언했던 미·일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며칠 후인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정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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