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간신열전] [217] 한 마음 재상 이원익
옛날 중국에서 늘 하는 말 중에 “한마음으로 두 임금을 섬길 수는 있어도 두 마음으로는 한 임금도 제대로 섬길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
이 말을 온몸으로 보여준 조선 재상을 꼽자면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년)이 첫째이다. 이원익은 어찌 보면 재상감이라기보다는 이조판서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판서감이었다. 세상의 격변에 따라가기보다는 자기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원칙이란 오직 백성 향한 한마음이었다. 출세를 도모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서북 지방으로 몽진하려던 선조는 가장 먼저 이조판서이던 이원익을 평안도도순찰로 삼아 평안도로 보낸다. 그전에 안주목사로 있을 때 백성들에게 누에치기를 권장하는 등 민생을 안정시켜 그곳 백성들이 흠모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온 후에 우의정 및 4도체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도성에 있지 아니하고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했다. 그후 좌의정, 영의정 등을 두루 역임했다.
그의 정치 노선은 유성룡을 따랐기에 남인에 가까웠으나 백성 사랑에 동서남북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북인들이 세운 광해군 초에도 그는 영의정에 임명된다. 그러나 광해군이 친형 임해군을 처형하려 하자 극력 반대하다가 병을 핑계로 고향에 내려갔다. 이이첨을 필두로 한 북인들이 주도한 이른바 인목대비 폐위론이 제기되자 이를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가야 했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반정 성공 직후인 3월 16일 실록이다. “이때에 와서 다시 수규(首揆·영의정)에 제수되니 조야가 모두 서로 경하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는데,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 실록은 그를 충정청백(忠貞淸白)했고 강정청고(剛正淸苦)했다고 평한다.
조선에는 조준, 하륜, 황희 등 경륜이 뛰어난 재상들이 있었지만 새해 벽두 왠지 이원익 같은 한마음 재상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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