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 새해가 밝다
새해가 밝아
생명 또한 그대로
밝아오누나
初[はつ]あかりそのままいのちあかりかな
새해 새날이 밝았다. 그 환한 빛으로 만물에 새삼 생기가 도는 듯하다. 신년의 계절어 ‘하쓰아카리(初あかり)’는 한 해의 맨 처음 밝아오는 빛을 이른다. 그 빛이 세상을 비추자, 지상의 생명도 환하게 밝아온다. 새해 첫 빛을 만끽하며 살아 있는 감격을 노래한 이 시는 하이쿠 시인 노무라 도시로(能村登四郎, 1911~2001)가 썼다.
새해에는 우리네 얼굴에도 환하게 해가 뜬다. 조선의 서촌에 살며 이런저런 사람 사는 모습을 글로 남긴 김매순(1776~1840)의 ‘열양세시기’에는 “설날 이후 수삼일 동안 장안의 남녀들은 성대하게 단장하고 서로 화려한 나들이옷을 입고 돌아다니다가 길거리에서 아는 이를 만나면 문득 반갑게 웃으며 ‘새해엔 크게 평안하시오’라고 말하면서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만 들어 서로 축하한다”라고 쓰여 있다. 아울러 “나의 고조할아버지가 지은 새해 시에 ‘장안 남녀가 길에서 하례하는데, 이날 안색은 양쪽 모두 복스럽네’라고 하였다”라고 썼다.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자연을 닮아가는 모양이다.
새해 아침에 경복궁과 서촌 일대에서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환하게 웃으며 걸어가는 사람들 얼굴을 보는데, 복스러운 신년 해가 거기 떠 있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널리 빛이 되는 문이라는 이름답게 새해에도 광화문(光化門)에는 넘실넘실 반짝이는 이들로 가득하다. 마음 같아선 아무나 붙들고 새해 인사를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소심해서 인왕산 계곡 아래 편의점 아주머니에게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했다. 아주머니 얼굴에도 환하게 해가 떴다.
열일곱 자에 우주를 담는 하이쿠에는 계절의 언어가 한 개씩 들어간다. 일본 국어사전을 보면 계절이 깃든 말마다 【季】라는 표시 뒤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신년 중 하나가 있다. 신년의 계절어에는 ‘첫(初)’이 붙은 단어가 많은데, 새해 들어 처음 웃는 웃음을 ‘첫웃음’, 새해에 동이 트며 처음 지저귀는 참새를 ‘첫참새’, 새해에 처음 하는 화장을 ‘첫거울’, 한 해의 맨 처음 쓰는 편지를 ‘첫편지’라 부르며 소중한 의미를 부여했다. 말이 있어 비로소 인식이 뿌리내리기도 한다. 새해의 어휘로 살아 있는 기쁨을 되새겨본다.
우리말에도 첫길, 첫눈, 첫술, 첫잠처럼 ‘첫’이 붙는 단어가 많다. 새해와는 관계없고 처음 가보는 길, 그해 처음 내리는 눈, 처음 든 숟갈, 막 곤하게 든 잠처럼 일의 시작을 가리킨다. 잠깐, 설날이랑 관련 있는 것도 있네! 첫도, 첫개, 첫걸, 첫윷, 첫모. 정월 초하루에 하는 윷놀이 용어다.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신명 나게 윷판을 벌였으면 속담까지 있다. ‘첫도가 세간 밑천이다.’ 맨 처음 던진 윷에 도가 나왔어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마라. ‘첫모 방정에 새 까먹는다.’ 제아무리 맨 처음 모가 나왔더라도 첫모는 실속이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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