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충제 회사가 만든 1등 위스키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열대 과일입니다. 열대 과일잼입니다.”
세계적인 위스키 품평가 찰스 맥린(Charles MacLean)이 ‘오 마이 갓’을 외치며 위스키 맛을 평가했습니다. 현장에 있던 심사위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만우절 장난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오갔습니다. 2010년 스코틀랜드 리스(Leith)에서 열린 블라인드 테이스팅 시음회에서 이름조차 생소했던 카발란 증류소 제품이 스카치 위스키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한국에 김소월이 있다면, 스코틀랜드에는 국민 시인 로버트 번즈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문학사에서 그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로버트 번즈의 탄생일인 1월 25일을 전후로 ‘번즈 나이트’라는 행사가 열립니다. 이날 행사의 일환으로 위스키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진행됐습니다. 시음회에 준비된 술은 스코틀랜드 위스키 3종과 잉글랜드, 대만 위스키까지 총 5종류. 주최 측이 위스키 브랜드를 숨긴 의도는 스카치위스키의 압도적인 우위성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만의 잔치에 잉글랜드와 대만 위스키가 들러리로 낀 셈이었죠.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찰스 맥린은 이날 꼴찌를 차지한 스카치위스키에 대해 “식용유도 디젤도 아닌 기계용 기름 맛이 났다”라고 혹평을 남겼습니다. 세계 최고로 여겨졌던 스카치위스키가 하룻밤 사이에 체면을 제대로 구긴 것입니다. 반면 대만 위스키인 카발란은 이날 이후 날개를 달고 비상합니다.
2010년에 대만 위스키가 세계 위스키 연감에 등재됐고, 2015년에는 카발란 솔리스트 시리즈의 ‘비노바리끄’가 월드 위스키 어워드(World Whiskies Awards)에서 최고의 싱글몰트로 선정돼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지금도 수많은 위스키 애호가들 사이에서 해외 면세가 기준 10만 원대 최고의 가성비 위스키 중 하나로 뽑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카발란 증류소는 어떤 곳이길래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모기 퇴치제로 시작된 카발란의 역사
카발란의 역사는 1956년 모기 퇴치제와 바퀴벌레 미끼로 사업을 시작해, 캔 커피(Mr. Brown)로 대기업 반열에 오른 대만의 킹카 그룹(King Car Group)에서 시작됩니다. 위스키를 사랑했던 리톈차이 회장은 2002년 대만이 세계무역기구에(WTO) 가입하면서 증류소를 설립합니다. 이전까지 주류 독점 생산권이 정부에 있어 민간에서 위스키 생산이 불가능했던 대만에서 2005년 최초의 위스키 증류소인 카발란이 탄생합니다. 카발란 증류소는 대만 북서쪽 이란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곳에 거주하던 원주민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대만은 아열대 기후로 습하고 더워서 위스키 생산에 이상적인 기후는 아닙니다. 위스키는 오크통에서 숙성과 동시에 원액이 조금씩 증발합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를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 부릅니다. 일 년 내내 서늘한 스코틀랜드에서는 매년 평균 2%가 천사의 몫으로 돌아가지만, 대만은 해마다 10~15%가 증발한다고 합니다. 대만에서 12년 이상 숙성 시 원액의 상당 부분이 증발해서 오크통에 남아 있는 술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증류소 설립 당시 컨설팅을 위해 초청받은 위스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대만에서는 위스키를 만들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과도한 증발량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 중 한 사람의 의견은 조금 달랐습니다. 위스키계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리는 짐 스완(Jim Swan)박사는 아열대 기후에 최적화된 위스키를 생산할 수 있도록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여기에 짐 스완의 수제자인 이안 창까지 카발란의 마스터 블렌더로 활약하면서 증류소는 본격적으로 사업에 시동을 걸게 됩니다.
그는 3년이라는 짧은 숙성 기간으로도 스카치위스키의 12년 숙성과 같은 풍미를 낼 수 있는 S.T.R(Shave, Toast, Rechar) 기법을 개발합니다. 이는 와인 오크통 내부를 깎아(Shave) 안 좋은 맛을 제거하고 통 내부를 불로 굽고(Toast) 다시 태워(Rechar) 열대과일 향과 바닐라, 초콜릿과 같은 풍미를 끌어내는 기법입니다. S.T.R 오크통에서 탄생한 제품이 카발란의 역작 비노바리끄입니다. 한편, 카발란의 5층짜리 숙성 창고 최고 온도는 42도가 넘습니다. 숨쉬기도 힘든 환경에서 오크통이 숙성되고 있는 것이지요. 여름에는 최대한 숙성고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창문을 닫아두고, 겨울에는 창문을 열어 낮은 온도로 숙성합니다. 대만 특유의 기온 변화를 극단적으로 활용하는 숙성 방식을 채택한 셈입니다.
◇전 세계인이 사랑한 위스키 솔리스트, 비노바리끄(Vinho Barrique)
카발란 위스키 중에 앞에 솔리스트가 붙는 제품들이 있습니다. 버번, 올로로소 셰리, 피노 등 그 종류가 다양합니다. 그중에서도 비노바리끄는 해외에서 20만원 이하로 보이면 고민 없이 사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BTS의 RM, 박찬욱 감독도 평소 솔리스트 시리즈를 즐겨 마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솔리스트란 카발란의 싱글 캐스크 스트렝스(Single Cask Strength: 한가지 오크통의 원액을 물로 희석하지 않고 병에 담은 것) 시리즈를 의미합니다. 카발란의 제품들은 숙성 연수표기 없이 대부분 NAS(None Age Statement)로 출시됩니다. 비노바리끄의 경우 5~6년 정도 숙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비노(Vinho)는 포르투갈어로 와인을 의미하고 바리끄(Barriqe: 대략 220L)는 오크통을 말합니다.
비노바리끄는 직관적으로 짙은 포도잼과 열대과일, 초콜릿 맛이 인상적입니다. 도수는 대부분 50도 후반으로 병입되기 때문에 높은 도수가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술맛이 강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알코올 도수가 너무 높다고 판단되면 물을 어느 정도 섞어 마셔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응축돼 있던 위스키의 향을 열어주고 맛도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단, 비노바리끄의 경우 모든 술이 싱글 캐스크(Single Cask)에서 나오기 때문에 같은 오크통에서 병입된 제품이 아니라면 맛에 편차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뽑기 운이 필요한 셈이죠.
신생 증류소인 카발란에게 20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역사는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역사가 짧은 만큼 품질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열대 기후의 단점도 장점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국제 대회 수상으로 그 실력을 입증하며 위스키 숙성 기간에 대한 인식을 바꿨습니다. 여러분들도 열대 기후가 빚어낸 달콤한 위스키 한잔 경험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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