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를 둘러싼 父子 싸움…유화로 그린 원초적 욕망 ‘립세의 사계’ [그 영화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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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백수진입니다. ‘그 영화 어때’ 36번째 레터는 영화 ‘립세의 사계’(10일 개봉)입니다. 스틸컷 한 장면만 봐도 여타의 영화와는 다른 독보적인 매력이 있죠. 2017년 ‘러빙 빈센트’로 유화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도로타 코비엘라·휴 웰치먼 감독의 신작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으로 제작한 ‘러빙 빈센트’처럼, 이번엔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등 세계 명화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낸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장르만큼이나 작업 방식도 독특한데요. 실제 배우들이 직접 연기한 촬영본을 유화 애니메이션으로 손수 그려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폴란드·세르비아·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 총 4개 제작 스튜디오에서 100명 이상의 페인팅 아티스트들이 투입돼 하루에 1~2프레임 정도의 그림을 그리며 25만 시간 동안 총 4만 프레임의 애니메이션을 완성했습니다.
지난해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키이우에 있던 제작 스튜디오는 문을 닫아야 했고 화가들은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이후에 스튜디오는 다시 문을 열었지만, 발전 시설이 전부 폭격을 당하는 바람에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모금 캠페인까지 벌여야 했죠. 그야말로 피, 땀, 눈물이 서린 애니메이션입니다.
유화 애니메이션이라기에 고상한 스토리를 상상했는데, 웬걸. 욕망이 들끓는 원초적인 이야기라 놀랐습니다. 1800년대 말, 폴란드의 농촌 립세 마을. 주변에 남자가 끊이질 않는 마을 최고 인기녀 야그나는 유부남 안테크와 눈이 맞습니다. 하지만 안테크의 아버지이자 부유한 지주인 보리나가 새 아내를 물색하던 중 야그나에게 눈독을 들이고.... 야그나의 어머니는 돈 욕심 때문에 딸을 팔아넘기듯 보리나와 결혼시키죠. 결국 아들과 아버지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급의 막장 극이 펼쳐집니다.
19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의 ‘농민’이 원작인데요. 안테크는 야그나에게 “너는 성스러운 땅 같아. 생기를 주는 땅”이라며 플러팅 멘트를 날립니다. 한쪽으로는 야그나를 둘러싼 막장극이 흘러가는 동시에 다른 한쪽으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이간질하고 싸우고 피를 흘리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야그나는 땅처럼 변화무쌍하고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줍니다.
다 보고 나면 “굳이 유화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야 했나? 일반 영화로도 재밌을 것 같은데?”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는 반대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화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그에 맞는 원작 소설을 찾았을 것이고, 그에 꽤나 적합한 원작을 찾았다고 봅니다. 19세기 폴란드 민요부터 농촌의 활기찬 풍속도가 유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와 잘 어우러지더군요. 오히려 실제 배우가 연기하는 영화로 만들었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스토리만 더 부각됐겠죠.
초반엔 살짝 어지러움 주의. 평소에 보는 고화질 화면에 길들어졌는지, 클로즈업 장면에선 쉴 새 없이 일렁이는 유화의 점들이 화면이 깨진 듯 어지럽게 느껴졌습니다. 반면 먼 거리에서 원경을 비출 땐 그야말로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더라고요. 붓 터치가 점 단위로 변하면서 계절이 바뀌는 장면은 유화이기에 가능한 탁월한 연출이었습니다. 눈이 적응되고 나면 이야기에 푹 빠져 낯선 형식마저 즐길 수 있는 작품일 것 같습니다.
‘립세의 사계’는 여러모로 감독의 도전 정신과 뚝심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되는 새해와도 잘 어울릴 듯합니다. ‘그 영화 어때’도 올 한 해 좋은 영화들을 소개해 드리기 위해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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