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견리망의 시대, 동료 시민 되기를 꿈꾼다

기자 2024. 1. 3.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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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를 좋아한다. 어느 하루를 산다고 해도 ‘오늘’은 어제에서 이어져 내일로 흘러가는 과정일 뿐이고, 우리의 일상은 드라마틱한 단절이라기보다는 경계가 불분명한 그러데이션에 가깝다. 12월31일과 1월1일이 크게 다를 리가 없지만, 그래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다가온 해의 첫날을 맞이한다고 생각하면, 대나무가 자라듯 마디를 하나 얻은 느낌이다.

매년 이때가 되면 찾아보는 게 있다. ‘올해의 인물/단어/사건’ 등과 내년의 전망이다. 전문가들이 권위 있는 지면을 통해 발표하는 내용도 흥미롭지만, 지인들이 전문성과 상관없이 꼽아 개인 SNS에 소개하는 리스트도 재미있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 고통, 호모 이그노런스, 외로움, 그리고 ‘좋은 이야기’. 2024년을 시작하면서 내가 꼽은 단어들은 이것들이다.

기후고통은 기후위기로 인해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정신적인 어려움을 의미한다. 미국 정신의학계에서 사용하는 개념인데, 이를 다른 어떤 말이 아닌 ‘고통’이라고 부르는 건 사람들이 우울뿐 아니라 죄책감, 불안, 분노, 좌절, 억울함 등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이런 고통의 총량이 “세계대전에 준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가 고통을 느낀다는 건 한편으론 희망이기도 하다. 당면한 위기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할 때 나오는 반응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고통을 외면하고 그 원인을 모르는 척한다는 점이다. 새로 접하는 정보로 인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 등이 흔들릴 때, 그래서 자신이 지켜온 정체성이 위협을 당할 때, 사람들은 변화보다는 기꺼이 모르기를 선택한다. 정보처리 방식에 따라 인간을 나누어 분석한 스웨덴 린셰핑대 팅회그 교수 연구팀은 ‘모르기를 선호하는 인간’을 무지한 인간, 즉 ‘호모 이그노런스’라고 칭한다.

이는 물론 기후위기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나는 최근 한 배우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우리 ‘무지한 인간’에 대해 돌아봤다. 경찰은 마약수사를 스펙터클로 만들어 성과를 포장하기 위해, 미디어는 주목을 끌어 돈을 벌려고, 대중은 도파민과 함께 판관으로서의 효능감을 누리느라, 사람에게 낙인을 찍어 사냥감으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어떤 식으로든 ‘이익’을 보는 상황에서 ‘진실’ 혹은 ‘의로움’은 알 바 아닌 것이 된다. 그야말로 교수신문이 2023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은 ‘견리망의(見利忘義)’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외로워진다. 한 번 실패하면 끝이라는 공포는 우리가 평생 시달려온 시험 만능주의와 ‘두 번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생존주의를 먹고 자라, 모두가 볼거리가 되는 주목경쟁의 시대에 극대화된다. 발아래는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기댈 수 있는 공동체나 곁이 없다면 어떻게든 내 한 몸만은 지키겠다는 보신주의가 발동한다. 김만권은 <외로움의 습격>에서 이런 자기중심적인 외로움이 타인을 배제하고 차별함으로써 ‘밥그릇’을 지키려는 혐오정치로도 연결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2024년 나의 무지를 깨워주고, 나로 하여금 충분히 슬퍼할 자리를 만들어주는 ‘좋은 이야기’(정혜윤, <삶의 발명>)를 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손해를 좀 감수하더라도 변화를 선택할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과정에서야 비로소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좋은 동료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동료 시민’이란 견리망의의 시대에 내 편만 챙기고, 내 이익에만 몰두하는 이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만들어낼 수도 없는 고귀한 가치다. 우리가 ‘내가 몰랐던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그렇게 서로에게 좋은 ‘동료 시민’이 될 수 있는 2024년이기를 꿈꾼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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