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제3지대, 의제와 비전을 가져라

기자 2024. 1. 3.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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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을 땐 늘 이 세상이 좋아지기를 소망한다. 다만, 정말 그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수준은 해마다 다르다. 안타깝게도 올해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낮다. 변화의 의지를 반영할 수 있는 총선이 약 100일 후에 있는데도 말이다. 사회를 바꿀 담대한 의제, 이를 책임질 정치 주체가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지난 대선 전후부터인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정책 의제가 사실상 실종된 시기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코로나19 등으로 사회개혁을 위한 논의가 활발했으나 이제는 정책 의제를 찾기 어렵고 오로지 소모적인 진영 대립이 우리 사회를 억누르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대통령이 올해 신년사도 울림이 없다. ‘노동, 교육, 연금의 3대 구조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 ‘저출산에 대해 지금과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녹음기 소리를 듣는 느낌이다. 개혁 동력이 가장 강력한 집권 초기를 흐지부지 보내고서 이제 다시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어서이다.

국회 과반 의석을 지닌 더불어민주당 역시 책임이 크다. 진취적 개혁보다는 대통령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으로 살아가니 적대적 공존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나마 정책 혁신의 호기였던 부동산 폭등 이후 시기에조차 집부자 감세에 공조해 버렸다. 윤석열 정부의 약자복지에 대응해서는 문재인 정부에서 주창했던 포용국가 비전을 발전시키거나 소득기반 사회보험, 실시간 소득파악 같은 시대적 정책 의제를 진전시키지도 않는다. 연금개혁에서도 정부에 구체적 방안을 내지 않았다고 비판만 할 뿐 자신의 대안은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근래 양당체제를 넘어서려는 정치세력에 눈이 간다. 거대 양당에 대한 불신이 큰 만큼, 이번 총선에서 이들이 의미있는 의석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계는 분명하다. 이낙연 신당, 이준석 개혁신당, 선거연합신당, 개혁연합신당, 새로운 선택, 한국의 희망 등 많은 조직이 등장하고 있으나, 실제 우리 사회를 획기적으로 바꿀 주체라는 믿음을 얻고 있지는 못하다. 시민들에게 미래를 이끌 비전을 제시하거나 지난 활동의 결과로 뚜렷한 정체성을 지녔다기보다는 선거제도 개편에서 ‘의석 확보’ 게임에 나선 참여자 정도의 모양새이다.

물론 총선에서 ‘생존’ 자체가 이들에게 절체절명의 과제임을 이해한다. 그래도 앞으로 100일이 그저 합종연횡하는 시간이어서는 곤란하다. 시민들이 제3지대를 주목하는 건, ‘당신들이라도 다른 정치를 하라,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꾸라’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다. 선거에서 손을 잡는다면 정치인의 일시적인 이해관계보다, 내가 대변하려는 시민들의 절박함이 판단의 핵심 기준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제3지대에 나선 세력들은 지금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제와 비전을 제안하고 이에 동의하는 세력끼리 편을 짜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노동, 교육, 연금 개혁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그만큼 이 의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안세력이 되고 싶다면, 이 의제에서 자신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개혁 청사진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윤석열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모두 뒷짐지고 있는 연금개혁은 새로운 정당들에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가! 초고령사회에 적극 대응하고 청년세대와 소통하는 미래지향적 의제이지 않은가! 국가재정도 그렇다. 윤석열 정부에게 부자감세하면서 건전재정을 말한다고 비판만 하지 말고 종합 증세방안과 적극적 재정역할이 담긴 자신만의 국가재정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대통령이 지금과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저출산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치를 선언한 세력이라면 더 설득력 있는 진단과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이러한 의제와 비전 잔치로 사람들이 북적여야 진정 제3지대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미래를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보편복지, 문재인케어, 전국민고용보험, 기본소득 등 사회 변화를 기대하게 하는 묵직한 정책 의제들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어느 때보다 새로운 정치의 역할이 요구된다. 이를 자임하는 세력들은 양당 적대정치 체제에서 일부 바깥 공간을 할당받는 소극적 생존을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총선 이후에도 제3지대일 수 있으며, 우리 세상을 좋게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정치주체로 커갈 수 있다.

어느 연초보다 새해 기대감이 낮은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제3지대가 앞으로 100일 기간에 한정된 정치 공간일 수는 없다. 총선 이후 무엇을 할 것인지를 시민에게 제안하고, 장식용 약속이 아니란 걸 보여주는 실질적 활동을 벌여야 한다. 긴 호흡으로 자기 의제와 비전을 가진 제3지대를 기대한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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