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당신의 올해 첫 책
새해 첫날 듣는 음악이 그해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우스운 미신이지만, 그저 다가올 해를 잘 가꿔보고 싶은 평범한 소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첫 음악은 이미 들어버렸고 은행에서 제공하는 신년 사주도 왠지 성에 차지 않는다면? 그래서 새로운 삶으로 끌어당기고 싶은 질 좋은 내러티브를 찾는다면? 그렇다면 이제는 새해의 첫 책을 고를 차례다. 음악이라면 새해가 가사를 따라간다고 믿듯 소설이라면 줄거리를 따라간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렇게 단순히 말할 수는 없다. 범죄 소설을 읽는다 해서 범죄를 옹호하는 게 아니듯, 소설의 내러티브에서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삶의 소스는 그보다 복잡하고 다양하니까.
내가 작정하고 골라본 올해 첫 책의 특별함은 작가가 살아온 삶의 궤적에도 있다. 이 젊은 미국 흑인 여성은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대학원에서는 교육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에는 은행원으로 일했지만, 2020년 웨스트버지니아대학 출판부라는 소규모 출판사에서 첫 소설집을 낸다. 작가가 되기 위한 일반적인 경로, 즉 화려한 교육 기관의 트레이닝 및 유명 출판사의 발굴 패턴을 밟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도서상, 펜/포크너상, 스토리상을 휩쓸고 전미도서상 파이널리스트까지 올랐으며 HBO Max에서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다. 얼마 전 번역된 디샤 필리야의 첫 소설집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23)에 관한 이야기다.
“책을 읽어 똑똑한 게 있고 살아봐서 똑똑한 게 있지”라고 분노를 담아 딸에게 훈계하는 가난한 흑인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가 복숭아 코블러를 만들어 유부남 목사를 유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직접 요리를 해보는 모범생 딸 앞에서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10년 넘게 동성과 성생활을 해왔으면서도 교회에서 승인될 만한 ‘순결’ 여부를 따지는 40대 여자, 어머니가 입원해있는 호스피스센터 주차장에서 낯선 남자와 밀회를 나누는 여자와 같이 보수적인 가부장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금기와 욕망, 자기부인과 죄책감, 헌신과 배덕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흑인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강렬한 정념과 위태로운 섹시함에 토니 모리슨이나 제임스 볼드윈을 떠올리겠지만 이 책에는 조금 더 날것 그대로의 격렬함이 있다. 딸은 자신을 단단하게 옭아매는 흑인 기독교 여성의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기내어 겨우 말한다. “내 인생은 절대 엄마 인생하고 같지 않을 거야. 아름다울 거니까, 부스러기가 아닐 거니까.”
그래서 책 제목인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에 어떤 비밀이 있다는 걸까? 성스러운 것들 아래 추악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진실? 여느 종교에서 금기시하는 불륜, 거짓말, 착취, 폭력, 동성애가 실제론 우리의 삶을 아주 미세한 구석까지 촘촘히 채우고 있다는 진실? 아니, 그것은 우리에게 조금도 비밀이 아니며 한 번도 은밀한 적이 없었다. 이 책이 감추는 동시에 드러내는 진짜 비밀은 그러한 삶의 한가운데서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여자들의 고군분투다. 주어진 인생이 어차피 달콤하지 않을 것이라면 애초에 맛보지도 말라는 단정 앞에서 금기시된 복숭아 코블러를 기어이 만들어보려는 욕망. 그리고 그 더럽고 달콤한 복숭아 코블러에서 깨져나온 부스러기일지라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믿음. 이 모든 억압과 폭력, 수치와 슬픔의 역사 사이로 드러나는 단단하고 또렷한 사랑이라면, 새해를 시작할 만한 첫 책으로 이만한 게 없을 것 같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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