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90초’ 룰

이용수 논설위원 2024. 1. 3.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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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도쿄 하네다공항 활주로에서 JAL 여객기가 일본 해상보안청 항공기와 충돌해 큰 화재가 발생하자 승객들이 대피하고 있다.
일러스트=박상훈

얼마 전 국군대전병원장이 된 이국종 교수는 중증 외상 분야의 국내 최고 권위자다. 2011년 아덴만 여명 작전 당시 해적 총에 맞은 석해균 선장, 2017년 판문점 JSA 귀순 당시 다섯 곳에 총상을 입은 오청성씨를 살려 국민의 박수를 받았다. 그가 15년 동안 수술실에서 쓴 메모를 바탕으로 2018년 펴낸 책이 ‘골든아워’다. 중증 환자의 생사를 가르는 사고 후 금쪽같은 ‘1시간’을 뜻한다. 한국과 일본에선 ‘골든 타임’이란 국적 불명의 용어가 많이 쓰인다.

▶골든아워 사수를 위해 도입된 것이 ‘날아다니는 응급실’로 불리는 닥터 헬기다. 그저께 부산에서 흉기 테러를 당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서울대병원으로 이송할 때도 등장했다. 육상엔 닥터 카가 있다. 2022년 핼러윈 참사 당시 한 국회의원이 사고 현장으로 향하던 닥터 카를 집 근처로 불러 배우자와 함께 탑승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어떤 사고에도 골든아워가 있다. 해난 사고는 통상 1시간이다. 유독 짧은 것이 항공기 사고다. ‘90초 룰’이다. 추락·충돌로 불길에 휩싸인 비행기가 견딜 수 있는 시간으로 그 안에 대피를 끝내야 한다는 뜻이다. 1960년대 미 연방항공청이 실험을 통해 정립한 규칙이다. 일정 규모의 항공기는 90초 안에 전체 출입문의 절반만 사용 가능한 상황에서 승객 전원이 탈출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비행기 연료 탱크의 위치와 구조, 실내 조명, 좌석 배치가 그냥 정해지는 게 아니다. 작년에 한 사람이 공중에서 여객기 비상문을 여는 아찔한 사고가 났다. “너무 쉽게 열린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이 역시 90초 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다 사고가 날 경우 ‘반말·고함 지시’를 듣게 된다. 비상 상황 시 승무원들은 “머리 숙여! 자세 낮춰!”를 목청껏 반복적으로 외치도록 훈련받는다. 국제민간항공기구 규정과 항공사별 객실 운영 교범에 따른 것이다. 존댓말에 익숙한 한국인에겐 생소하겠지만 그걸 따질 상황은 아니다. 2016년 한 방송사에서 실험해보니 존댓말 안내 땐 탈출에 104초가 걸렸지만, 반말 지시 땐 71초가 걸렸다.

▶지난 2일 도쿄 하네다공항 활주로에서 JAL 여객기가 일본 해상보안청 항공기와 충돌해 큰 화재가 발생했다. 여객기가 화염에 휩싸여 대규모 인명 피해가 우려됐지만 승객과 승무원 379명 전원이 무사했다. 승무원들이 90초 룰에 따라 신속히 대피시켰다고 한다. 기내 자신의 짐을 포기하고 통제에 따른 승객들도 귀감이 됐다. 한국이라도 그랬을 것이란 견해와 아닐 것이란 의견이 엇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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