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지와 곱세크 [어도락가(語道樂家)의 말구경]
편집자주
세상 언어들의 이모저모를 맛보는 어도락가(語道樂家)가 말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틈새를 이곳저곳 들춘다. 재미있을 법한 말맛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숨겨진 의미도 음미한다.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연말연시가 되면 떠오르는 인물로 찰스 디킨스 원작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이 있다. 영어는 scrooge가 일반명사처럼 쓰여 여전히 구두쇠를 일컫는다. 그걸 일반명사로 쓰는 언어는 드물지만 '스크루지'라는 비유는 한국에서도 아직 비교적 잘 통한다.
북한에는 '구두쇠/수전노'를 뜻하는 '곱세크'라는 외래어가 있다. '조선말대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은 속어로서 유래는 고리대금업자 곱세크(Gobseck)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오노레 드 발자크 중편소설 '곱세크'다. 한국에서는 몇 해 전에 '꿈꾼문고'에서 처음 번역·출간했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물론이고 정작 프랑스어조차 gobseck를 구두쇠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쓰지 않는다. 프랑스인이라 하더라도 발자크의 그 작품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곱세크'만 듣고서는 뜻을 짐작하기 어려울 법하다. 러시아어 гобсек[곱세크]를 거쳐서 북한에 들어왔을 텐데 러시아어에서도 이제 그렇게 많이 쓰는 표현은 아니다.
발자크의 소설을 각색한 소련 영화 '곱세크'가 두 번이나 만들어져서 러시아어에 이런 용법이 퍼졌겠지만, 이제 원산지 프랑스와 중계지 러시아보다 북한에서 그 용법이 자리를 잡은 점이 특이하다. 초기 자본주의의 삭막한 모습을 잘 그린 발자크가 북한에서 꽤 많이 읽혀서 그렇기도 하겠으나, '곱세크'가 깍쟁이(약빠른 또는 인색한 이)를 뜻하는 함경남도 방언 '꼭쇠'와 발음이 살짝 비슷해서 많이 쓰는지도 모르겠다.
스크루지(Scrooge)나 곱세크(Gobseck)나 둘 다 영어 및 프랑스어 또는 어느 언어에도 없는 가상의 성씨다. 예술 작품에서 흔한 일이지만 특히나 환영받지 못하는 주인공의 작명을 할 때 실제 성씨에서 따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인색한 사람을 일컫던 예스러운 말인 '고바우'는 '곱세크'와 슬쩍 비슷하고, '구두쇠'의 뜻인 크로아티아어 škrtac[슈크르타츠], 러시아어 скряга[스크랴가]는 '스크루지'를 닮았다.
'구두쇠'는 '굳다(재물을 아끼고 지키는 성질이 있다)'에 마당쇠, 돌쇠, 덜렁쇠, 알랑쇠 따위의 접미사 '쇠'가 붙어 생겼다는 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어원이다. 이런 용법은 지금은 많이 안 쓰지만, 의미상 '돈 굳었다'의 '굳다(돈이 남다)'와 이어진다. 글자 그대로는 '굳은 빵'인 포르투갈어 pão-duro[빵두루]는 돈 아끼려고 딱딱해진 빵을 먹는 '구두쇠'를 일컫는다.
구두를 오래 신으려고 밑창에 쇠를 덧대는 사람이라는 설은 민간어원일 가능성이 높은데, 공교롭게도 이탈리아어 lesina[레지나]는 구둣방에서 쓰는 송곳과 더불어 구두쇠도 뜻한다. 실제로 옛날에 구두쇠들이 송곳을 지니고 다니며 손수 구두를 고쳤다기보다는 16세기 이탈리아 작가가 풍자극에서 묘사했던 모습이다. 이 말은 프랑스어에서도 차용됐다. 스크루지나 곱세크와 더불어 문학 작품에서 유래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렇게 말들은 국경을 건너서 차용되고 차용된 곳에서 더 오래 남기도 한다. 1921년 미국에서 만든 초코 바닐라 아이스바(하드) 상표 Eskimo Pie가 러시아어 эскимо[에스키모]로 불리고 북한으로도 들어가 '에스키모'는 아이스크림을 뜻하는 일반명사가 됐는데, 초코 바닐라 하드를 일컫는 프랑스어 esquimau도 유래가 같다. '곱세크'와 달리 '에스키모'는 프랑스어, 러시아어, 북한어 다 쓰는 말이다. 북한이 러시아만큼이라도 잘살게 되면 '곱세크'라는 표현도 사라질까? 세상 사람들이 두루 잘사는 길이 무엇일지 새해 벽두 다시금 생각들 해봐도 좋을 것이다.
신견식 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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