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엡스타인 명단
미국 정·관·재계에서 ‘엡스타인 명단’이 화제가 되고 있다. 금융투기업자로 미국 주류사회 마당발이었던 제프리 엡스타인은 미성년자 성착취 범죄 조직을 운용했고, 2019년 감옥에서 자살했다. 이 사건으로 처벌된 사람은 엡스타인의 조력자 기슬레인 맥스웰이 유일하다. 지난달 뉴욕 연방법원 로레타 프레스카 판사는 한 피해자가 맥스웰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언급된 관련자 실명을 모두 공개하라고 결정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앤드루 영국 왕자, 사업가 빌 게이츠, 노엄 촘스키 교수 등이 보도를 통해 알려진 상태다. 명단이 약 150명에 달할 것이라고 하니 큰 파장이 있을 듯하다.
문제가 된 소송은 한 성착취 피해자가 2015년 제기해 2017년 화해 조정으로 종결됐다. 하지만 그 후부터 미국 언론들은 재판 과정에 언급된 익명들을 추적했다. 클린턴은 엡스타인의 전용기에 여러 번 탑승한 적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앤드루는 엡스타인 주선하에 당시 미성년자를 성폭행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촘스키는 엡스타인으로부터 금전을 받은 걸로 보도됐다. 대부분 20년 가까이 지난 사건들이다. 언급된 유력자들은 ‘억울하다’ ‘불법은 없었다’고 항변해왔다. 그런 상황에서 명단 공개가 이뤄지는 것은 의미가 있다. 여성과 미성년자를 성착취 범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 사건의 전체 그림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법원이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엡스타인 자살로 많은 피해자들이 정의 실현 기회를 박탈당한 상황이다.
2006~2007년 건설업자 윤중천씨가 개인 별장에서 김학의 전 법무차관 등을 성접대한 의혹 사건이 떠오른다. 수사기관은 2013년 의혹이 처음 불거졌을 때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거론하며 의혹 확산을 막았고, 세 차례나 재수사하면서도 관련자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교묘하게 좌절시켰다. 진상규명도 불가능해졌다. 검찰이 지금처럼 비판 언론의 대통령 명예훼손 의혹 사건을 수사하는 결기의 절반만 보여줬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엡스타인 사건은 공고하고 추악한 남성 권력자 연대가 전 지구적 현상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만 그것을 대하는 방식은 사회마다 다를 수 있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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