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 사라진 정치, ‘테러’가 점령했다 [박찬수 칼럼]
반대하는 정치인에게 물리적 공격을 가하거나 신체적 위해를 입혀선 안 된다는 점을 선거법 또는 정당법에 명문화하긴 곤란하다. 그래도 우리는 말이나 글로 정치인을 비판할 순 있어도 폭력을 행사해선 안 된다는 점에 동의해왔다. 그런 행동은 정치·사회 안정을 해칠 것이란 점에 공감해왔다. 이런 공감과 동의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 작동엔 더 중요하다. 지금 그런 가치는 손쉽게 외면당하고 있다.
박찬수│대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부산에서 습격당한 사건은 충격적이다. 경찰 발표를 보면, 범인은 이 대표를 살해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목을 겨냥해 흉기를 휘둘렀다고 한다. 제1야당 대표를 죽이려고 행동하는 건 1945년 해방 직후의 무정부적 혼돈 상황이나 군부독재 정권이 정적을 제거하려는 비밀공작 차원에서나 가능했을 법한 일이다. 평시에, 그것도 선거로 정권을 바꾸는 게 뿌리내린 한국 사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놀랍다.
정치인 테러가 곧바로 민주주의 후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2006년 5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겨냥한 커터칼 테러 이후에도 우리는 평화적인 촛불 시위를 통해 대통령을 바꾸는 민주주의 진전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다른 측면에서 위기를 알리는 경종임이 분명하다. 민주주의란 오랫동안 쌓은 나름의 원칙과 규범에 의지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정치적 행동과 태도를 제어할 수는 없다. 빈틈을 메우는 상식과 합의가 필요한데, 어느 순간 그게 증발해 버린 느낌이다.
가령 대통령이 대국민 기자회견을 하는 건 중요한 일인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8월 이후 단 한번도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에 직접 답변한 적이 없다.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을 하라는 강제규정은 어디에도 없지만 이걸 어기는 순간 정치의 핵심인 소통은 취약해진다.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정치인에게 물리적 공격을 가하거나 신체적 위해를 입혀선 안 된다는 점을 선거법 또는 정당법에 명문화하긴 곤란하다. 그래도 우리는 말이나 글로 싫어하는 정치인을 비판할 순 있어도 칼로 찌르거나 폭력을 행사해선 안 된다는 점에 동의해왔다. 그런 행동은 정치·사회 안정을 해칠 것이란 점에 공감해왔다. 이런 공감과 동의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 작동엔 더 중요하다. 지금 그런 가치는 손쉽게 외면당하고 있다.
지난 대통령선거를 흔히 ‘비호감 대선’이라 불렀다. 여야 모두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네거티브 선거운동으로 반사이익을 얻으려 했던 탓이다. 박빙의 차이로 당선된 윤석열 대통령은 선거 이후에 그 상처를 씻어내야 했지만, 갈등과 분열에 기댄 상대방 공격은 1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대통령이 국회 과반 의석을 가진 제1야당 대표와 단 한차례도 진지하게 국정을 협의하지 않은 건 단적인 예다.
이런 상황에선 극단적으로 정치에 몰입한 이들이 폭력에 경도되는 걸 막는 저항선은 훨씬 약해진다. 부산의 폭력은 돌발적이고 개인적일 수 있지만, 그 밑바닥엔 대선 때의 증오가 평시의 정치까지 지배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 깔려 있다.
이재명 대표 피습을 ‘쇼’라고 외치는 지지자를 향해 “내가 피습당했다고 생각해달라”고 말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말은 진심일 터이다. 이번 사건이 4월 총선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가장 노심초사할 사람은 어쩌면 한동훈 위원장이다. 2006년 지방선거 직전에 일어난 박근혜 대표 피습이 한나라당의 선거 압승에 날개를 달아줬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때 박 대표가 깨어나자마자 했다는 “대전은요?”라는 말은 상징적이다. 한동훈 위원장은 이제까지 이재명 대표를 ‘정치적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범죄자’로 여기고, 정치에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봤다. 아무리 혐의가 뚜렷하다 생각해도 제1야당 대표라면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불구속 기소해서 법원에서 진실을 다투는 게 정상이다. 굳이 국회에 체포동의안을 내고 유죄를 속단하는 듯한 본회의장 발언을 길게 한 건 야당 대표를 ‘적’으로 봤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의 노선과 정책엔 반대하지만 그 정당이 선거에서 이긴다면 국정을 운영하고, 국회 다수당으로 활동하는 걸 인정하고 대화하겠다는 자세는 필요하다. 넬슨 만델라는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된 뒤 자신을 27년간 투옥했던 백인 정권에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다. ‘당신을 27년간 투옥하고 수많은 흑인을 박해한 백인 정권을 어떻게 증오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만델라는 “증오는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지도자는 누군가를 미워할 여유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윤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제1야당 대표를 범죄자로 보는 시선을 거둬야 한다. 병상의 이 대표는 우리 사회에 가득 찬 증오와 분노의 감정이 더는 높아지지 않도록 하길 바란다. 부산의 불행한 사건이 한국 정치를 조금은 바람직한 길로 접어들게 한다면, 그건 바로 이 대표의 노력 때문일 것이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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