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들이 놀라는 한국인의 독특한 심성은

한겨레 2024. 1. 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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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워낭소리’의 한장면. 제작사 제공
※오늘 24회차로 ‘이선경의 나를 찾아가는 주역’ 연재를 맺습니다.
그동안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정역에 대한 관심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리고 지난 20년 동안 한류 및 한국이라는 국가브랜드의 성장을 돌아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20여년 전 주방기구를 신나게 두들기는 퍼포먼스 공연 ‘난타’가 크게 성공을 거두자, 이에 고무된 제작자가 영국에 가서 공연 제안을 하였더니, 돌아온 대답이 “한국같은 나라에서도 공연을 하느냐?”였다는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지난 시절 한국은 늘 약소국이고 개발도상국이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이제 선진국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은 듯 보인다. K-팝, K-드라마, K-푸드, 한국어 배우기 등 전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가는 K-열풍을 보며, 20세기의 한국과 21세기의 한국의 모습은 참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흐름과 더불어, 약 140년 전 앞으로 한국이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 부상하는 시대가 오리라는 예언을 선포한 문헌 ‘정역’에 대해서도 새삼 관심이 증대되는 것 같다. 그동안 세간에 간간이 소개되던 ‘정역’의 이야기들은 지구의 자연질서가 극심하게 변화할 것이고, 그에 따라 인문질서도 새롭게 세워질 것이며, 한국이 세계의 주역(主役)이 되어 새문명의 방향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역’에 담긴 예언적 이야기들은 ‘정역’에 솔깃하거나 반대로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이유가 되어 온 것 같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장면. 제작사 제공

주역과 정역 사이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열 달 동안 엄마 뱃속에서 잘 길러져야 한다. 그 과정이 없이는 결코 생명이 완성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 나오기 전과 후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이다. ‘주역’과 ‘정역’의 관계를 이같이 비유할 수 있겠다. ‘주역’의 시대와 원리를 거치지 않고서는 ‘정역’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지 않고서 어떻게 어른이 되겠는가. 그런데 ‘주역’이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선천(先天)이라면 ‘정역’은 조양율음(調陽律陰)의 후천(後天)이다. 물론 ‘정역’의 관점에서 보아 그렇다는 말이다. ‘억음존양’은 ‘음을 억제하고 양을 높인다’라는 뜻이며, ‘조양율음’은 음과 양이 고르게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주역’은 음과 양의 균형과 조화를 이상(理想)으로 하지만, 현실세계의 적용에서는 양(陽)을 존귀하게 여기고 숭상하는 양(陽) 중심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양(陽)이 생명의 기운을 뜻하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역’의 체계에서는 가부장제, 신분제, 남성중심주의가 정당화되며 또 그것을 그 시대의 불가피한 현실적 요청으로 간주한다. 비유하자면 ‘주역’의 시대는 인류의 성장기와 같아서 모순과 불균형으로 점철된 성장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었다는 것이 ‘정역’에서 ‘주역’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에 비해 ‘정역’은 이제 인류가 성숙한 어른으로 완성되어 음과 양이 고르게 작용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고, ‘조양율음’이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담고 있다. 인류는 역사상 늘 한편에서는 절망을 만들어 내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끈질기게 고귀한 가치를 향해 나아왔으며,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초현실적인 논리가 되겠지만 ‘정역’의 관점에서는 ‘주역’에 이미 수 천년 후에 출현할‘정역팔괘도’의 내용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본다. 역(易)의 세계에서‘괘도’라는 것은 한 문명의 표상(表象)과도 같은 물건이기 때문에, 새로운 괘도의 출현이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그런데 ‘주역・설괘전’에는‘복희팔괘도’와‘문왕팔괘도’에 대한 설명이 있고, 그 외에‘복희팔괘도’‘문왕팔괘도’ 중 어느 것과도 맞지 않아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팔괘에 대한 설명이 또 들어 있어서 역대의 학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종래 ‘주역’의 체계에서 한국은 동북방을 나타내는 간방(艮方)으로 인식되었다. 중국대륙을 기준으로 보면 한국은 동북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역’에는 “(주역의 문명은) 간방에서 이룬다(成言乎艮)”라 하고 또 “만물을 마치고 만물을 시작하는 것이 간(艮)보다 성대한 것이 없다”라고 쓰여있다. 주나라 문왕(文王)이 창도한 ‘주역’이 간방(艮方)에서 끝을 맺으며, ‘간방’에서 만물이 마치고 다시 시작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주역’은 63번째 괘인 기제(旣濟)로 닫혔다가 64번째 괘인 미제(未濟)로 다시 열리니, 못다한 ‘미제’의 숙제를 받아 그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 ‘정역’이라고 본다.

신비성과 합리성의 양측면을 포괄하는 것이 역(易)이라는 학문의 특징임을 염두에 두어야겠다.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어떤 섭리에 대한 외경은 공자가 지은 것으로 보는 ‘역전’에도 있으며, 성리학의 집대성자이자 역학연구의 새로운 차원을 열은 주희(朱熹)에게도 뚜렷하게 존재한다. ‘주역’은 공자에게 “묵묵히 이루고(黙而成之) 말하지 않으면서 믿는(不言而信)” 세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간(艮)은 소년을 뜻한다. 지난 수 천년간 중국이 맏형처럼 주도한 중화문명은 자타공인 동아시아 세계를 이끌어 왔다. ‘정역’에 따르면 그 문명은 한국으로 건너와 그 대미(大尾)를 이루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조선을 중화문명의 마지막 보루, 겨우 하나 간신히 붙어 있는 양(陽)의 기운으로 인식하였다. 이제 문명의 차원을 전환하여 새로운 씨앗을 싹틔울 때가 되었다. 한국이 젊은 후발주자로서 새시대의 문명을 주도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역’이 말하는 후천은 어떤 세계인가?

까치밥. 사진 강창광 기자

자연변화, 정역(正曆)의 도래와 정륜(正倫)의 실현

‘정역’을 이야기할 때, 관심을 끌기도 하고 곤란하기도 한 것이 자연변화에 대한 내용이다. ‘정역’에서는 후천세계가 도래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자연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이 때문에 큰 환란이 있을 것을 예고한다. 오늘날 기후변화의 심각성은 이미 ‘기후재난’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축이 바로 섬으로써 윤달이 없어지고 일년이 360일의 정역(正曆)이 된다던가, 그로 인해 혹한혹서가 없어지고 일년 내내 봄과 가을같은 날씨가 계속될 것이라는 내용을 과학적 사실에 대한 언급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더구나 그때가 정확히 언제냐에 대한 호기심으로 ‘정역’ 공부에 몰두한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하기 어렵다. ‘정역’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기후재난이 가져올 것으로 예측되는 미래는 매우 두렵다. ‘정역’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자연변화에 대한 예언이 성사되느냐의 여부나 한국의 미래에 대한 부푼 전망이 아니라, 인간 변화와 완성의 메시지, 후발주자로서 인류를 향한 한국의 사명에 대한 확신과 책임, 그리고 장구한 역사를 통해 일구어 온 우리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다. ‘정역’은 오랜 역사를 통해 온축된 한국정신문화의 결정(結晶)이기 때문이다.

인간변화, 겸손하고 고귀하며 유일한 사람

‘정역’에서는 천지가 뒤집히는 극심한 자연변화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본다. 이른바 ‘후천’이다. 360일을 주기로 하는 정역(正曆)이 들어선다는 것은 기후가 온화해지고 자연의 질서가 바로잡히며, 사람의 심성도 거듭나 초인간이 등장하며 정륜(正倫)을 실천하게 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환상적으로 들리지만, 돌이켜 보면 인류에게 ‘축의 시대’라 불리는 시기가 있었다. 기원전후 5~6세기 사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인류에게 빛이 되는 가르침을 전해 준 성인(聖人)들이 출현하였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어둠을 밝히는 현인들이 이어져 왔다. 왜 하필 그 시기인가? 어떤 섭리를 생각하게 된다.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에는, 그 가르침을 직접 듣고 바로 깨우치는 이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경전의 문자는 그 생생함을 그대로 담기 어려운 법이니, 진리의 화신(化身)인 이가 바로 곁에 있다면 그 감화력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 나아가 ‘정역’은 개개인이 깨달음의 주체가 되어 ‘지극한 사람(至人)’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정역’을 창도한 김항(金恒)의 호는 일부(一夫)이다. ‘일부’는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유일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평범한 한 사람, 그러나 지극히 고귀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평범하면서도 유일한 이런 존재를 ‘황극인(皇極人)’이라 부른다. ‘선천’ 시대의 황극(皇極)은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황(皇)은 임금을 뜻하고, 극(極)은 표준을 뜻한다. 과거 시대에 표준과 기준은 오직 임금에게 있었지만, 이제는 평범한 개인이 스스로 표준인 절대 주체이다. 이러한 정신을 “일부(一夫)가 만부(萬夫)된다”는 말로 표현하며, 이것이 ‘정역’이 그리는 완성된 인간, 진리의 능산자(能産者)로서의 인간상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늘을 대신하여, ‘하늘의 일(천공·天工)’을 행할 수 있다. ‘정역’에 말하였다. “누가 하늘의 일이 사람을 기다려 이룰 줄 알았으랴!”

‘하늘의 일을 대행한다’는 것에는 ‘비워둠’의 정신, ‘존공(尊空)’사상이 들어 있다. 황극인인 자녀들이 천지부모의 수고를 대신하고, 부모를 일 없는 자리에 편안하게 모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배려와 존중을 넘어 ‘존숭’을 담고 있다. 아무리 인간이 잘나더라도 부모의 자리를 범하지 않는 ‘낮춤’과 ‘겸손’을 말한다. 그것을 ‘문왕팔괘도’와 ‘정역팔괘도’의 변화된 모양을 통해 말하자면, 선천시대 ‘문왕팔괘도’에서는 부모격인 건과 곤이 서북과 서남의 귀퉁이에서 막내딸인 ‘태(兌)’괘를 돌보며 일하고 있었는데, ‘정역팔괘도’에서는 건(乾)과 곤(坤)이 북과 남의 정(正)방위로 복귀하여 제자리를 잡고, 이제 천하의 일은 다 자라난 자녀들이 천지부모의 뜻을 받들어 대신 행한다고 풀어낼 수 있다. 천지변화에 따른 새질서와 정륜(正倫)의 실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역’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은 바로 이 ‘존공’과 ‘황극’ 사상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인류사회를 혁신하고 최고의 복지세계를 만들어 가는 일에 간방(艮方)의 사람들이 앞장서 나가야 할 사명과 책무가 있다는 것이 ‘정역’의 궁극적 메시지일 것이다.

합동 세배. 사진 이정아 기자

원수인 줄 알았더니 혼인할 짝이로구나

이 연재의 첫머리로 돌아가 본다. 인간은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로서 정신과 물질, 이상과 현실의 상반된 세계를 종합 지양하는 주체라는 천지인 삼재 사상은 한국의 사상사를 관통해 왔다. 그리고 그 결실이 ‘정역’의 ‘황극인’이라고 생각한다. ‘하늘과 땅의 소산인 인간, 그러나 하늘 땅을 자기 속에 담은 인간’으로 요약되는 삼재의 인간은 혼자 잘난 존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향한 우주적 연대의식 속에서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엄한 주체이다.

‘25시’의 저자 게오르규는 25시를 넘어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사상적 희망을 한국에서 발견하고, 단군신화의 ‘홍익인간’을 세계 어떤 종교와도 모순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으며, 마치 어둠에 싸인 베들레헴 산골에서 빛이 탄생한 줄을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20세기 켜켜이 쌓인 어둠 속에 놓여 있는 조그마한 나라 한국이 장차 세계에 빛을 던질 것이라 통찰하였다. 펄벅이 가난한 한국의 농촌에서 감탄하였던 겨울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겨두는 정서, 저녁 무렵 소달구지의 짐을 지게에 나누어지고 소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 그리고 오늘날 공항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여행 가방으로 줄을 세워 놓아도 별로 잃어버릴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의 사회적 신뢰, 이러한 문화를 단순히 빈부의 차이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게오르규나 펄벅의 통찰에 무턱대고 환호할 일도 아니지만 소홀히 여길 일도 아니라고 본다. 21세기 K-컬쳐를 통해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의 선한 영향력은 그 바탕에 긴 역사를 통해 온축된 사상적 문화적 지층이 두텁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연재의 첫 회에서 밝힌 것처럼 역의 사유방식은 숨은 보석과 같이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한국인의 마음씀을 통해 그 독특한 모습이 드러난다. ‘홍익인간’은 천지인 삼재로서 인간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며, 우리의 태극기는 역(易)의 ‘생명살림’의 인(仁)을 구현한다. 훈민정음은 천지인 삼재의 휴머니즘이 글자 지은 원리가 된 전무후무한 사례이다. 역의 사유를 특징짓는 용어인 관계, 상생, 평화, 생명, 중도, 균형, 주체, 창의 등이 수 천 년을 지탱해 온 한국인의 끈덕진 저력의 원천이라는 점을 다시 이야기 하고 싶다. 이제 우리는 한국사상사로부터 다양성을 수용하고 이질성을 아우르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모색해서 세계로 나가야 할 것이다. ‘주역’의 이야기대로 간방(艮方)은 ‘만물을 마치고, 만물을 시작하는’ 땅이다. 20세기 이념 대립의 마지막 잔재가 남아있는 이 한반도가 “원수인 줄 알고 노려보았더니, 혼인할 짝이로구나”(‘주역・비괘賁卦’)를 외치며 하나가 됨으로써 세계를 향한 평화와 생명의 터전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descStyl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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