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정치, 민주주의 위협하고 테러 부추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 사건을 두고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는 여야 정치인들의 자성과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정치 문화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폭력을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몇몇 정치인들은 “정치 실종 사태를 나부터 반성하겠다”고 말했다.
정성호 민주당 의원은 3일 SBS 라디오에서 이 대표 피습 사건의 근본 원인을 묻자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가장 결정적인 징후가 상대방에 대한 관용의 정치가 실종되는 것”이라며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고 밝혔다. 정 의원은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지지자들이나 국민을 양극단으로 몰아넣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만든다”며 “우리 정치권이 너무 정치를 양극화시키고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민주당 소속 김상희 전 국회부의장은 이날 통화에서 “정치가 극단적인 정쟁으로 치달으면서 여야 간 소통과 타협이 어려워졌다”며 “당내에서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엄청난 공격이 이뤄지고 소통 방식도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지적했다. 김 부의장은 “이 대표에 대한 테러는 규탄해야 하지만 우리 정치도 혐오 정치, 증오의 정치, 상대를 악마화하는 정치를 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반성을 넘어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변재일 민주당 의원은 “사람들이 유튜브를 통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이 강해지고 있다”며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혐오하는 양극화된 정치를 어떻게 해소하는가가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이고 국민들의 걱정”이라고 밝혔다. 변 의원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반성만으로는 부족하고, 헌법상의 권력 구조를 바꾸고 연정이 가능한 다당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중진 서병수 의원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 대표의 테러를 보도한 기사에 붙어있는 댓글조차 참담한 폭력”이라며 “어쩌다 우리 정치에 이리도 폭력이 일상화되었을까. 나를 포함해서 정치한다는 사람들 모두의 책임”이라고 밝혔다. 서 의원은 이날 기자와 한 통화에서 “정치가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극단화돼 있다. 점점 과격한 언어를 쓰고 자기 주장만 한다”며 “잘못이 있으면 사과할 줄 알아야 하는데 사과하면 진다고 생각한다. 그것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극렬 지지층에 휘둘리는 문제도 지적됐다. 윤희석 국민의힘 선임대변인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이 대표 피습에 이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한 살해 협박글이 올라온 것을 두고 “극렬 지지층 입장에서는 그런 식의 위험한 생각을 할 상황이 벌어졌다”며 “정당이 이런 분들의 의사를 흡수해 정화된 여론을 만들어야 하는데 민주 정치의 사명을 구현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권에 몸담은 사람들이 책임감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통화에서 “극한의 대립이 있는 상황을 해결하려면 정치권에서 본을 보여야 한다”라며 “나부터 잘하면 되지 않나, 나라도 (상대 비방을) 하지 말자 해서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김기현 지도부 최고위원에 이어 한동훈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개 발언에서 상대 당을 비난하지 않고 정책 제안을 이어가고 있다.
이 대표 피습 사건 이후 여야 지도부는 정쟁을 자제하고 있지만 여야 지지자들과 일부 유튜브에서는 음모론이 퍼지고 있다. 일부 극우 유튜브 방송은 이 대표 피습을 두고 “정치적 쇼” “가짜 칼로 피도 연출”이라고 주장하는 등의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같은 정당 내에서도 대립이 반복됐다. 국민의힘 초선 의원들은 지난해 12월11일 김기현 전 국민의힘 대표 사퇴를 주장한 같은 당 소속 서병수, 하태경 의원 등을 향해 단체대화방에서 “내부총질” “자살특공대” 등의 거친 글을 올린 바 있다. 지난해 10월 민주당 비이재명(비명)계 의원들 지역구 사무실 앞에는 “나에게 한 발의 총알이 있다면 왜놈보다 나라와 민주주의를 배신한 매국노(비명계)를 백번 천번 먼저 처단할 것이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비명계 의원들이 깨진 수박을 머리에 뒤집어쓰도록 합성한 사진도 함께 실렸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들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취해달라는 비명계의 요구를 외면해왔다.
정치 원로들은 정치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 공격적 언어 사용을 자제하라고 당부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이날 CBS 라디오에서 “정당 대표들이 누가 더 자극적인 말을 구사하느냐 하는 경쟁을 하는 것 같다”며 “정치 지도자들이 언어 순화부터 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가 앞으로 큰 문제가 되겠다”고 말했다. 정치권이 대화와 협치를 복원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상대방을 타협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며 “정치인들이 실종된 정치를 복원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윤나영 기자 nayoung@kyunghyang.com, 이두리 기자 redo@kyunghyang.com, 문광호 기자 moonlit@kyunghyang.com, 탁지영 기자 g0g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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