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리걸테크 산업 발전과 데이터의 중요성
“리걸테크 활성화를 위해서는 판결문 데이터 공개 확대가 필요합니다”
지난 해 12월, 법제처가 주최한 리걸테크 업계 간담회에서 주요 이해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말이다. 리걸테크 산업 활성화를 위해 업계 의견을 수렴하고자 마련한 자리에서 대다수 기업은 판결문 공개 확대 의견을 강력히 피력했고, 법제처는 “향후 지원 방안을 모색하겠다”라며 화답했다. 리걸테크 업계에서 판결문을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판결문 데이터는 법률 인공지능(AI) 기술 개발과 발전에 핵심적인 요소다. 판결문에는 법률문제에 대한 다양한 사실 관계와 주장, 이와 관련한 법원의 법리적인 판단과 결론까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또한 △공통의 법률 용어와 법률 정보를 활용한다는 점 △논리적인 구성을 갖췄다는 점 △표준화된 형식에 따라 작성된다는 점 등에서 법률 AI 학습을 위한 데이터로 매우 적합하다. 판결문 외에 현행 법령 및 과거 법령, 논문 자료 그리고 법원 내부망(코트넷)에 쌓여있는 수많은 실무 경험 데이터 등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AI 개발에 핵심이 되는 자료가 많이 공개될수록 양질의 데이터 학습이 가능해지고 리걸테크 기술이 발전한다. 또 이를 활용해 법률 업무를 보조하는 서비스가 만들어지면 법률 전문가는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사건을 처리할 수 있게 되고, 법률 전문가의 조력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받을 수 있는 국민들이 늘어나게 된다. 리걸테크 업계가 판결문 확대를 꾸준히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는 AI 기술이 가져오는 혁신적인 변화를 몸소 체감하고 있다. 2022년 11월 오픈AI가 선보인 챗GPT는 수많은 이슈를 만들며 다양한 업계에 연구, 개발 및 활용되기 시작했고, 리걸테크 업계 역시 생성형 AI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전 세계 수많은 리걸테크 기업들은 이미 각자의 기술력을 앞세워 법률 시장에 펼쳐질 새로운 기회를 빠르게 포착하기 위한 혁신적인 서비스 개발에 한창이다.
최근 로앤컴퍼니는 한국어와 대한민국 법률에 최적화된 자체 AI 시스템 '빅케이스GPT'의 연구성과를 공개했다. 빅케이스GPT는 오픈AI의 GPT-4를 기반으로 증강검색생성기법 모델과 자체 고안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적용했으며, 제12회 한국 변호사시험 객관식 문항에서 GPT-4보다 19.3% 포인트 높은 53.3%의 정답률을 기록해 업계 주목을 받았다. 로앤컴퍼니는 빅케이스GPT 고도화를 통해 법률 리서치, 법률 서면 요약, 법률 서면 질의응답, 법률 서면 초안 작성 등 변호사의 업무 효율을 높여줄 변호사향 B2B SaaS 솔루션 개발에 주력 중이다. 미국 종합법률정보회사 렉시스넥시스도 지난해 생성형 법률 AI 서비스를 출시하면서 한국 시장 진출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렇듯 기술 발전은 비약적으로 가속화되고 있고 국내 리걸테크 기업도 분주히 뒤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기술 연구를 위한 데이터 공개 움직임은 여전히 더디고, 공개되는 판결문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법원행정처 자료 등에 따르면 최근 4년간 공개된 연평균 판결문 수는 약 43만건으로, 같은 기간 전국 법원에서 선고한 전체 판결 130만여건의 30%에 불과한 수준이라고 한다. 2020년 12월 8일 민사 미확정 판결서 공개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민사소송법 163조의 2 조항이 개정되면서 지난해부터 민사·행정·특허 사건의 미확정 판결문도 검색 및 열람이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하급심 판결문은 제한적으로 공개하고 있어 해외 주요국에 비하면 개방 수준이 매우 낮은 편이다. 판결문에 대한 접근도 쉽지 않다. 인터넷 판결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별도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고, 검색 기능도 제한적이라 원하는 판결문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 한다.
반면 해외 주요국은 판결문을 적극적으로 공개하는 추세다. 미국은 1988년부터 모든 판결문을 전자기록화하고 있고, 대부분의 사법 정보를 자유롭게 볼 수 있다. 또 미확정 판결문도 24시간 이내에 공개하고 있으며, 판결문뿐만 아니라 소송에 제출된 서류들도 열람 가능하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에서는 소송 전반에 대한 정보 비대칭 문제를 해소하고, 법률전문가의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다양한 서비스가 등장하며 리걸테크 산업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미확정 판결문을 홈페이지에서 빠르게 공개하고 있으며, 독일은 연방법원 및 고등법원 홈페이지를 통해서 미확정 판결문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 또한 대법원 홈페이지를 통해 판결문과 미확정 판결문까지 전면 무료로 공개 중이다.
판결문 공개 확대에 대한 요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21년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사법부에 판결문 개방 확대를 제안했다. 미개방 핵심 데이터 중 하나인 판결문 데이터를 온라인을 통해 효과적으로 열람하도록 하고, AI 학습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골자다. 변호사 업계도 판결문 공개 확대에 찬성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해 9월 '새로운 미래를 위한 청년 변호사 모임(새변)'은 하급심 판결문 공개를 요구하는 성명을 통해 “하급심 판결문 데이터 공개에 소극적인 것은 법치주의 원칙을 지켜야 하는 사법부의 의무 해태”에 해당한다며, “AI와 리걸테크가 발전하는 현대 사회에 찾아보기 드문 정보 제한의 현장”이고, “법원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1, 2심 미확정 판결문을 공개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최근 취임한 조희대 대법원장도 국회 인사청문회 출석 당시 “재판과 사법정보의 공개 범위를 넓혀 재판 절차의 투명성을 높이고 국민의 알 권리를 증대하는 데에 진력하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 이렇듯 판결문 공개 확대를 위한 크고 작은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더 많은 판결문이 공개되면 양질의 법률 AI 학습이 가능하고, 이는 한국어와 우리나라 법률에 최적화된 수준 높은 AI 시스템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구축된 시스템은 법률전문가의 업무 효율성을 증진시키고, 국민의 사법 접근성을 높인다. 리걸테크 산업 성장으로 국가 경쟁력이 향상되는 것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결국, 판결문 데이터 공개 확대는 법률 시장의 양적, 질적 성장, 리걸테크 산업의 성장 그리고 우리나라의 법률 서비스 대중화와 선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속도에 발맞춰 우리나라 법률 IT 시스템과 법률 AI 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법조인이 함께 협력해 정책적인 지원을 위한 가이드라인 제정이 필요하다. 무섭게 성장하는 글로벌 리걸테크 기업으로부터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고, 리걸테크 업계와 변호사, 국민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선진화된 법률 서비스 시장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공정하고 투명한 법률 시스템 마련을 위한 과감하고 적극적인 논의가 하루 빨리 이뤄져야 한다.
〈필자〉고려대에서 산업공학과 금융공학을 전공으로, 경영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다. 졸업 후 약 3년간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앤드컴퍼니'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근무하고, 법률서비스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변화를 일으키고자 2012년 김본환 대표와 '로앤컴퍼니'를 창업했다. 현재 로앤컴퍼니는 국내 1위 법률서비스 플랫폼 '로톡'을 비롯해 법률 정보 검색 서비스 '빅케이스' 등 법률서비스의 대중화와 선진화에 기여할 서비스를 다양하게 만들고 있다.
정재성 로앤컴퍼니 부대표(공동창업자) js.jung@lawcompany.co.kr
손지혜 기자 jh@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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