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는 어떻게 메이저리거가 됐을까
‘이종범 아들이 뭐 저래’ 극복한 포커페이스와
두려움 없는 배팅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바람의 손자’가 태평양을 건너간다. 넥센, 키움 히어로즈에서 7년간 뛰었던 이정후(25)는 최근 미국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6년 총액 1억1300만달러(약 1466억원)에 계약했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 전 엘지(LG) 트윈스 코치가 케이비오(KBO)리그를 거쳐 일본 프로야구(주니치 드래곤즈)에서도 뛰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버지에 이어 아들도 국외 리그에서 활약하는 셈이다.
선천적 재능에 ‘타격 2초 뒤 뛰기’ 더해져
누군가는 선천적 디엔에이(DNA)의 힘이라고 말하겠다. 하지만 설령 유전적 힘이 있더라도 부자가 모두 한 분야에서 슈퍼스타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아버지가 레전드급 선수인데 아들은 그에 못 미치는 경우를 야구뿐만 아니라 스포츠 전반에서 많이 봐왔다. 샌프란시스코 구단 입단식에서 ‘아버지에게서 특별히 배운 게 있는가’라는 물음에, 이정후는 “야구로 배운 것은 없다”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이종범 전 코치 또한 “야구 기술은 팀 코치나 감독에게 배우라고 했다. 나는 정신적 부분만 얘기해줬다”고 했다. 이정후는 타고난 운동신경을 기반으로 스스로 리그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고 하겠다.
이정후의 타격 메커니즘은 아마추어 때 얼추 완성됐다. “처음에는 끝까지 스윙을 안 하고 공을 방망이에 갖다만 맞히고 빨리 1루로 뛰어가려는 경향이 강했다”(오태근 당시 휘문고 코치)고 한다. 그때 오태근 현 휘문고 감독이 했던 조언이 “스윙을 하고 1초, 2초 뒤에 뛰어라”였다. 더불어 “너는 프로에 가서 곧바로 3할을 치고 신인왕까지 할 능력이 있는 선수다. 고교 때 잘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교는 프로에 가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기본기를 다져라”라는 말로 이정후를 다독였다. 오 감독은 “좌타자의 경우 빨리 치고 1루로 뛰어가려는 경향이 강하다. ‘완벽하게 풀스윙하고 뛰어라’라고 하면 잘 안 되니까 마음속으로 2초까지 세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타격 2초 뒤 뛰기’는 점점 몸에 배었다. 그리고 프로 지명 뒤 웨이트트레이닝으로 살을 찌우고 힘을 키워서 스프링캠프에 참여했는데, 타격의 질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정후는 “타격폼을 바꾼 것도 아닌데 불과 2~3개월 전만 해도 펜스 앞에서 잡혔던 공이 다 넘어갔다. 그래서 ‘기본기가 중요하구나’ 했다”고 말했다. 오태근 감독은 “(이)정후는 지는 것을 싫어한 선수였다. 승부욕이 엄청났다”며 “미션이 주어지면 끝까지 달성하려 했고 겨울에도 혼자 훈련하는 등 노력을 엄청 하는 선수였다. 질문도 많이 했다”고 돌아봤다. 더불어 “아버지 이름에 누가 될까 고민하는 모습도 보였다”고 했다.
타격 5관왕 직후에 타격폼을 바꾸다
‘이종범’이라는 세 글자는 이정후의 야구 인생에 엄청난 부담이었다. 고교 시절만 해도 선발로 나가면 “이종범의 아들이니까 특혜를 입는다”라거나 안타를 하나도 못 치면 “이종범의 아들이 뭐 저래”라는 뒷말이 들려왔다. 이정후가 프로 데뷔 초반 경기장 안팎에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김태형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이정후는) 고졸 신인인데도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포커페이스였다. 신인이 마치 베테랑 같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야구를 보고 자라서 아버지를 따라 야구선수가 됐지만 결국 아버지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해마다 나아지는 성적에도 그가 절대 만족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이정후는 2022년 타격 5관왕에 오르고 정규리그 최우수선수상(MVP)을 차지한 뒤 타격 기술에 변화를 줬다. 보통 좋을 때는 그대로 폼을 가져가는데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더 빠르고, 더 강한 타구를 날리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프로야구 개막 달인 4월에 2할대 타율(0.218)을 기록했다. 2017년 프로 데뷔 뒤 최악의 슬럼프였다. 방망이가 너무 안 맞아 사우나에서 몸에 소금을 뿌려보기도 하고, 어머니가 성당에서 받아온 성수를 타석에 뿌리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에게조차 낯설고 기나긴 타격 부진이었다. 그나마 5월에 반등 기미(타율 0.305)를 보이더니 6월 타율 0.374, 7월 타율 0.435로 원래 모습을 회복했다. 이정후는 타격 변화 시도에 대해 “내가 잘하려면 변화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윙 변화로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처음 겪어본 만큼 더 성숙해지고 이후 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졌다”고 말했다. 7월 말 발목 부상으로 시즌을 조기 마감한 그의 2023년 성적은 86경기 출전, 타율 0.318, 6홈런 45타점. 이정후는 “내가 준비한 것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서 나온 성적이다. 부상으로 인해 연속 기록을 못 이어간 게 아쉬울 뿐”이라고 했다.
이정후는 KBO리그 7시즌 동안 타율 0.340, 출루율 0.407, 장타율 0.491, 65홈런, 515타점, 69도루, 581득점을 기록했다. 3천 타석 이상 기준으로 KBO리그 통산 타율이 제일 높다. 마운드 위 투수들은 이정후를 상대하면 “던질 곳이 없다”고 말한다. 방망이 콘택트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 KBO리그에서 뛰었던 조시 린드블럼(전 두산 베어스)은 미국 스포츠 전문매체 <디애슬레틱>과 한 인터뷰에서 “이정후는 어떤 카운트에서도 타구를 만들어냈고, 2스트라이크에서도 스윙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공을 넣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적극적인 공격 자세로 이정후는 프로 7시즌 동안 3947타석에서 304차례만 삼진을 당했다. 이에 비해 병살타는 64차례밖에 없었다. 2023년엔 고작 1개뿐(387타석)이었다. 이정후는 “삼진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이지만, 어떻게든 그라운드 안에 공을 넣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라며 “그런 마음으로 어릴 때부터 연습했고, 콘택트가 좋아진 것 같다”고 했다. 공에 대한 집착이 메이저리그 데뷔 첫해 연봉 700만달러(약 90억8천만원), 2025년 1600만달러(약 207억6천만원), 2026년과 2027년 각각 연봉 2200만달러(약 285억4720만원)를 만들어냈다.
이정후가 어릴 적 일기와 함께 작성한 버킷리스트에는 ‘메이저리그 진출’이 없었다. 하지만 프로 입단 뒤 그가 걸어왔던 길이 아시아 야수로서 최고액으로 빅리그 입단이라는 문을 열었다. 아버지 이름이 버거워서, 혹은 삼진에 대한 두려움으로 타석에서 움츠러들었다면 절대 열리지 않았을 문이다. 압박 환경을 탄탄한 기본기에 기반을 둔 적극적인 자세로 돌파한 이정후였다. ‘오늘’이라는 타석에서 우리는 삼진을 피하기에 급급했을까, 아니면 이정후처럼 어떻게든 공을 쳐내려고 했을까. 일단 공만 때려내면 ‘다음’은 있다. 땅볼이어도, 뜬공이라도 상대 실책이 나올 수 있다. 병살타는 어쩔 수 없지만. ‘2024년에는 일단 무조건 치고 보자’라는 마음을 먹게 된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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