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피습…‘상호 관용’이란 인류사적 혁신을 포기할 건가[핫이슈]

김인수 기자(ecokis@mk.co.kr) 2024. 1. 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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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 피습 기사에 붙는
증오와 혐오의 댓글들
민주주의는 돌아가면서
지는 게임이라는 것을 믿는
상호관용은 어디로 갔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일 부산 강서구 가덕신공항 부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60대 남자에게 피습을 당했다. 이 대표가 바닥에 누운 채 손수건으로 지혈을 받으며 구급차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테러를 당했다는 기사에 붙는 댓글이 참담하다. 더 이상의 테러를 막자며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상호 관용’을 호소하는 댓글은 찾기 힘들다. 상대편을 탓하며 이 대표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혐오를 쏟아내는 글들이 상당수다. 증오를 부추기는 이런 글들을 볼 때 마다 인터넷 댓글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존재 가치를 회의하게 된다. 소통의 창구가 아니라 증오의 확산 통로가 됐다.

이래서는 안 된다. 우리가 상호 관용을 포기하는 순간, 어렵게 쌓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일제 압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 4월 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은 모두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를 수립하기 위한 희생이었다. 상호 관용을 잃는 순간, 그 모든 희생은 물거품이 된다.

우리는 이제 상호 관용이 무엇인지 그 기본 정신부터 되새겨야 한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상호 관용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상호 관용이란 정치 경쟁자가 헌법을 존중하는 한 그들이 존재하고, 권력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개념이다. (중략) 비록 그들의 생각이 어리석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상호 관용의 세상에서는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집권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들 역시 우리가 집권하는 것을 인정한다. 상대편의 주장이 아무리 어리석고 심지어 혐오스럽게 보인다고 해도 상대의 집권을 수용하는 게 상호 관용이다.

이런 상호 관용의 정신은 ‘인류사적 혁신’이다. 수만 년 인류 역사를 놓고 볼 때 아주 최근에야 생겨났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편을 나눠 싸웠다. 제한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죽이려 했다. 고대와 중세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인류 사회는 정치적 상대편을 이단시했다. 반대는 곧 반역이었다.

민주주의 고향 중 한 곳으로 꼽히는 미국도 독립 초기에는 상호 관용이 없었다.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연방주의자 집단과 공화주의자 집단으로 나뉘어 서로를 반역자 취급했다. 왕정복고를 도모하고 있다거나 혁명주의 프랑스를 추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양측 모두 서로의 파멸을 원했다. 경쟁자를 합법적으로 처단하기 위한 수순까지 밟았다고 했다. 다행히 미국은 수십 년 만에 경로를 바꿀 수 있었다. 상호 관용 없이는 미국이라는 새 공화국이 무너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한몫했다. 상대가 권력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한국도 지금 국민의힘이든 민주당이든 서로에게 집권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상대의 주장이 아무리 혐오스럽다고 해도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얼마 전 영국의 저명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북한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보수와 진보가 갈릴 뿐 경제 정책은 별 차이가 없다는 기사를 내보낸 바 있다. 외국 전문가들이 보기에 양당은 이념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서로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난무하고 상대를 악마화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결국 상대에 대한 혐오를 부추겨 권력을 잡고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에게 국민이 놀아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된다.

민주주의는 ‘돌아가면서 지는 게임’이다. 이번에 우리가 이겼지만 다음번에는 저들이 이기는 걸 상상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그래야 승자는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고 패자에 관용을 보인다. 패자 역시 다음번 선거를 차분하게 준비하며 건전한 비판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반대로 한쪽이 계속 이기는 게임이 되는 순간, 양쪽은 폭력으로 치닫게 된다. 테러가 잇따라 발생한다. 그 끝은 ‘전제주의 수용소 체제’다.

김인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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