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의 한해’와 슬픈 예감

조계완 기자 2024. 1. 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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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태영빌딩 앞 태영건설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조계완 | 정책금융팀장

“앵무새도 훈련시키면 얼마든지 훌륭한 경제학자로 만들 수 있다. 수요와 공급, 오직 이 두 용어만 가르치면 된다.”

초급 입문 과정에 들어선 경제학도들이 교수로부터 흔히 듣는 은유 중 하나다. 시장은 인류가 지금까지 고안해낸 효율적 자원 배분 메커니즘 중에서 최상의 발명품이라는 가르침이다.

돈·토지·기계 등 한정된 자원을 누가 가장 효율적으로 잘 사용할 것인가? 저축하는 사람이 돈 빌려 쓸 사람을 스스로 찾아다닐 필요도, 최적 자원 배분을 위해 어떤 조직이 가동될 필요도 없다. 그저 비용(가격)을 가장 많이 치를, 가장 필요한 사람이 사용하도록 하면 된다. 합리적인 경제인이라면 빌려 간 돈 이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우리가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앵무새 훈련’은 수요-공급으로 움직이는 시장의 힘, 그리고 그런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이 균형과 효율을 보장한다는 강고한 믿음을 짧게, 강렬하게 설파한다.

그러나 연말과 새해 벽두에 터진 태영건설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작업) 돌입은 시장이 효율적 자원 배분에 자주 실패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태영건설은 2022년 이전 대략 10년간 저금리 시대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신용(대출·보증)을 무리하게 끌어다 써왔다. 오랜 저금리 시대에 이어 2022년 봄부터 글로벌 인플레이션발 고금리 체제 2년을 통과하면서 한국 경제는 가계·기업 모두 고물가·고금리·저성장이라는 ‘3고(苦)’ 피로감이 한데 겹친 속에 2024년을 맞았다. 앞당겨 빌려 써온, 누적된 부채 위험이 훗날로 계속 이연돼왔으나 이제 파열음을 내며 본격 파급되는 ‘결산의 계절’에 들어섰다. 신용공급(대출·채무)은 국민경제에서 투자·생산·소비를 진작해 소득과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지만, 종국에는 ‘신뢰 허약’의 위기를 낳으며 경제 전반에 걸쳐 무언가를 무너뜨리는 파열음과 상처를 안겨다 주곤 했다. 주택 거품의 후유증이 끝내 터져 나온 부동산 피에프는 그 대표적인 도화선이다.

경제 영역에서 ‘파열음’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삶의 문제다. 피에프발 신용경색은 국민경제의 금융중개시스템 불안을 예고할 뿐만 아니라, 철강·시멘트업은 물론 새로 지어지는 주택·사무실에 쓰일 각종 가전·생활제품 업종 그리고 나아가 일용직을 포함한 일자리 문제까지 악영향을 초래한다. 무릇 모든 경제적 위험은 시차를 두고 파급되면서 사회경제적 계층·집단별로 차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소득분배와 불평등 구조를 변동시키기 마련이다. 고도성장기를 마감한 지금, 과학이 챗지피티(ChatGPT)·2차전지·인공지능(AI)반도체를 위시한 기술을 창조·혁신하고 기업은 이것을 빠르게 응용·가속하고 있으나, 경제 회복과 반등이 미약한 활력 잃은 한국 경제에서 인간은 ‘경제 감속·정체 시대’에 적응해야 할 처지에 있다.

피에프 부실은 건설사·시공사·은행·증권·캐피털·저축은행·상호금고·보험사가 함께 위태롭게 얽히고설켜 있는 터라 올 한해 각 부문에 걸쳐 고통 분담을 둘러싼 갈등이 부상할 것이다. ‘질서 있는 정리’의 길을 걷게 될지, 혼돈 속에 휘청이며 헤매게 될지 아직 알 수 없다.

이런 때일수록 경제부총리, 금융당국 수장, 국토교통부 장관을 비롯해 경제정책을 지휘·운용하는 관료들에게만 ‘관리’를 맡길 일은 아니다. 특히 눈앞에서 벌어지는 경제 현상과 사태 그 뒤편에서 날렵하면서도 묵직한 진단·처방을 제시하는 경제논객들의 활약이 요청된다. 유튜브에 무성한 돈벌이·성공 메시지에 모두가 휩쓸려 몰려드는 요즘 세태에, 존경하거나 경의를 표할 만한 경제평론가들의 말과 글은 안타깝게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시대 정신생활 풍토의 한 특징인데, 개탄할 일은 아니고 삶과 세상이 바뀐 것도 맞다. 그럼에도 ‘날카로운 경제논평’은 여전히 필요하다.

별다른 신년의 감흥 없이, 우울한 ‘불만의 한해’가 와 있다는 이 예감이 훗날 틀린 것으로 판명 나기를 소망할 뿐이다.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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