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 정치국 이인자, 이스라엘군 공격에 사망…다시 불붙는 전쟁

‘전체 서열 3위’ 알아루리 부국장 숨져
하마스 “휴전 협상 중단” 보복 예고
이란도 격한 반응…전쟁 중대기로

살레흐 알아루리 하마스 정치국 부국장의 2018년 모습. AP연합뉴스

이스라엘군이 2일(현지시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외곽에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시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하마스 정치국 2인자로 불리는 살레흐 알아루리 부국장이 사망했다. 하마스는 곧바로 휴전 협상 중단을 선언했고, 헤즈볼라도 “레바논 공격은 주권 침해”라며 보복을 예고했다. 이란도 “저항에 다시 불이 붙을 것”이라며 격하게 반응했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서 일부 철수하기로 하면서 다소 누그러지는 듯했던 전쟁의 불길이 다시 치솟는 모양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이스라엘 무인기(드론)가 베이루트 외곽 하마스 사무실을 타격해 7명이 사망했다. 부상자도 속출했다. 이후 하마스는 성명을 통해 알아루리 부국장이 사망자 명단에 포함됐다고 밝혔다.

알아루리 부국장은 하마스 정치국 2인자이자 하마스 전체 서열 3위로 평가받는 핵심 인사다.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하마스 지도자로 오랜 기간 활동해왔으며, 하마스 핵심 전력인 카삼 여단을 창설한 초기 멤버이기도 하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엔 주로 베이루트에 머물며 사실상 헤즈볼라 주재 하마스 대사로 활동했다”고 보도했다. 이란과 헤즈볼라, 하마스로 이어지는 ‘시아파 벨트’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해왔던 셈이다.

AP통신에 따르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해 10월7일 전쟁 발발 전부터 하마스 지도자 야히아 신와르와 함께 알아루리 부국장을 우선 제거 대상으로 꼽아왔다. NYT는 “이스라엘이 하마스 조직을 섬멸하고 지도부를 모두 제거하겠다고 공언한 이후 살해된 첫 하마스 최고위 인사”라며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 밖에서 하마스 최고 관리가 암살된 첫 사례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알아루리 부국장 사망의 후폭풍은 거셌다. 하마스 정치국장인 이스마일 하니예는 “이는 테러 행위이자, 레바논 주권 침해이자, 팔레스타인에 대한 적대 행위”라며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이스라엘과의 모든 협상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하마스 고위 관계자 이자트 알리시크도 “가자지구에서 우리의 용감한 저항은 절대 약해지지 않을 것”이라며 강력한 보복을 예고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 라말라 등 주요 도시에선 대규모 반이스라엘 시위가 벌어졌다.

개전 후 하마스와 거리를 둬왔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도 이스라엘 규탄에 나섰다. 무함마드 시타예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는 “뒤따를 수 없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고, 마무드 아바스 자치정부 수반이 이끄는 집권당 파타 라말라 지부는 3일 하루 총파업을 예고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2일(현지시간) 요르단강 서안지구 나블루스에서 살레흐 알아루리 하마스 정치국 부국장 사망을 규탄하는 반이스라엘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레바논 역시 발끈했다. 외신들은 그동안 이스라엘군이 주로 레바논 남부 국경 근처에 있는 무장정파 헤즈볼라 시설을 공격했는데, 수도 베이루트 인근을 때린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나지브 미카티 레바논 임시 총리는 “레바논을 새로운 국면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라며 이스라엘을 비난했고, 헤즈볼라도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의 알아루리 부국장 암살은 대응 없이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라며 “저항 세력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자지구에 주둔하던 이스라엘 일부 지상군의 철수와 휴전 및 인질 석방 협상 재개를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압박, 미국·이집트·카타르 등의 중재 노력 덕에 진정 기미가 보였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이로써 다시 ‘시계 제로’ 상태에 빠졌다. 무엇보다 하마스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온 이란이 보복을 시사했다는 점에서 확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란 국영 IRNA통신에 따르면 나세르 카나니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시온주의자 정권(이스라엘)이 테러와 범죄에 기반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입증한 범죄”라며 “순교자의 피는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자유를 추구하는 전 세계 모든 사람 사이에서 시온주의 점령자들에 맞서 싸우려는 저항에 다시 불을 붙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스라엘군은 말을 아꼈다. 다니엘 하가리 이스라엘군 수석대변인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알아루리 사망 관련 질문에 답변을 피한 채 “방어와 공격 모든 분야에서 매우 높은 수준의 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네타냐후 총리 또한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국제사회는 한목소리로 확전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모든 당사자가 극도로 자제해야 한다”며 “긴장 완화를 위한 긴급 조치를 취할 것으로 촉구한다”고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이스라엘 전시 내각에 참여한 베니 간츠 국가통합당 대표와 통화하며 “긴장을 고조하는 어떤 행위도 피해야 한다. 레바논에선 더욱 그래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미국은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미 매체 악시오스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이번 공격에 대한 사전 정보를 미국에 알리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의 미 고위 관계자는 NYT에 “휴전 합의를 위한 회담이 당분간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오는 5일 이스라엘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계획도 다음 주로 연기됐다. 조정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은 알아루리 부국장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블링컨 장관의 이스라엘 방문 일정이 연기됐다는데 주목했다.

손우성 기자 applepi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