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맛’ 혀 아닌 뇌가 감지… 적당한 섭취는 스트레스 해소 등 도움[살아있는 과학]
뇌가 매운 통증 맛으로 착각
캡사이신 위 염증 줄이지만
과다하면 암 발병 높이기도
앞서 우리가 배운 것을 잠깐 정리해봅시다. 인간의 혀는 미뢰(맛돌기)를 통해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그리고 감칠맛을 느낀다고 말씀드렸죠? 흔히 ‘오미(五味)’라고 부르는 다섯 가지 맛입니다. 원래 네 가지 맛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1985년 일본에서 우마미(umami·감칠맛)를 등록해 오미가 되었습니다. 우마미는 이케다 기쿠나에 도쿄대 화학과 교수가 일본 된장국이나 생선 조림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구수한 맛에 착안해 1908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해 밝혀낸 새로운 맛입니다. 이케다 교수는 다시마를 산더미처럼 조린 다음, 금속염으로 침전시켜 구수한 맛의 결정을 뽑아냈습니다.
이 물질은 화학적으로 글루탐산이 주성분입니다. 가쓰오부시(가다랑어), 버섯, 다시마 등 일본어로 ‘다시(出汁)’라고 부르는 해물 육수에 많이 들어있죠. 그러나 천연재료 다시마 40㎏을 끓여야 겨우 30g의 글루탐산을 얻을 정도로 추출에 돈과 시간이 들었습니다. 인공적으로 합성하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결국 화학조미료 ‘글루탐산 소듐(MSG·Monosodium Glutamate)’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현재 시중에서 팔리는 MSG 조미료는 대부분 동남아시아산 사탕수수를 발효시켜 화학적으로 제조합니다. 한때 유해 논란이 빚어진 적도 있으나 전 세계 모든 식품안전 전문기관들은 향미 증진제로 인정하고 사용량을 따로 규제하지 않습니다.
천연 글루탐산과 발효 공정으로 화학 제조한 MSG가 몸 안에서 다른 효능을 낸다는 증거 역시 없습니다. 천연 글루탐산은 동물의 고기와 생선, 해조류, 버섯과 토마토, 견과류, 콩, 우유 등에 풍부하게 들어있으나 다른 아미노산과 단단하게 결합한 단백질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추출하려면 오랜 시간 가열하거나 발효시켜야 합니다. 유명 곰탕집에 가면 ‘밤새 푹 곤 국물 맛’의 구수함을 선전하지 않나요? 감칠맛을 뽑아내는 게 이렇듯 어렵기에 인공 MSG가 나온 겁니다.
자,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오면 혀의 미뢰에 있는 ‘G 단백질 결합 수용체(GPCR)’가 음식의 분자와 결합해 맛을 느끼게 됩니다. G는 ‘구아닌’의 준말이죠. 미국의 의대 교수 2명이 GPCR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밝혀내 201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매운맛이라고 느끼는 감각을 받아들이는 혀의 수용체는 없습니다. 매운맛을 유발하는 캡사이신 분자는 GPCR이 감지하지 못합니다. 캡사이신은 맛이 아니라 고온과 통증이기 때문입니다. 혀의 세포에는 온도를 감지하면 활성화되는 단백질 수용체가 있는데 여기에 들러붙습니다.
항온 동물은 신체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온도별로 여러 가지 수용체를 작동하고 있습니다. 고추 속 캡사이신은 섭씨 43도 이상의 고온을 감지하는 ‘TRPV1’ 수용체를 자극합니다. 캡사이신이 입안에 들어와 TRPV1과 결합하면 이온 통로가 열리고, 여기서 칼슘 이온이 방출돼 통증을 감지하는 신경세포도 활성화되는 겁니다.
뇌는 고추의 뜨거운 온도를 매운맛으로 착각하는 거죠. 매운 음식을 먹으면 땀이 나고 차가운 음료를 찾게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또, 캡사이신이 통증을 유발하면 몸에서는 진통 효과를 내는 호르몬인 엔도르핀을 분비합니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 불닭, 불 족발을 찾는 이들이 매운맛을 먹고 상쾌함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경마 대회에서는 한때 기록 향상을 위해 말에게 캡사이신을 먹이기도 했다는군요. 그래서 국제승마연맹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부터 캡사이신을 금지 약물로 지정했습니다.
매운맛의 세기는 ‘스코빌 지수(Scoville Heat Unit·SHU)’로 표시합니다. 미국 화학자 윌버 스코빌이 1912년 제안한 방법이죠. 스코빌 척도 지수가 높을수록 매운맛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고추는 0, 피망은 1이고 한국의 청양고추는 1만에 달합니다. 하지만 세계 10위권 안에도 못 든다고 하네요. 인도 고추 품종인 부트 졸로키아는 100만, 중국의 고추 품종인 캐롤라이나 리퍼는 220만이나 되니까요.
세계적으로 고추를 양념으로 사용하는 전통은 5000여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의 고유 음식 김치는 원래 소금에 절인 채소로 흰 김치였으나 17세기 고추가 수입되면서 빨간 김치가 탄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캡사이신, 그러니까 매운맛의 생리적 효능에 대해서 의학계는 찬반 의견이 갈립니다.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해서 피부 미용,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고 신경통, 관절염 등의 예방에 좋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연세대 의대 연구팀은 2017년 캡사이신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감염된 위 점막의 염증을 억제해준다고 발표했습니다. 반면, 울산대 의대 서울아산병원 연구팀은 2014년 매운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암세포를 제거하는 면역세포 NK세포의 기능을 저하시켜 암 발생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놓았습니다.
중세 시대, 전설의 연금술사로 독성학의 대가로 불리던 파라켈수스는 “세상의 모든 외부 물질은 모두 독이다. 다만, 그 분량이 문제일 뿐”이라고 설파했죠. 가령, 인체에 필수적인 소금과 설탕도 과다 섭취를 하는 순간 독으로 변해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공격한다는 겁니다. 적절한 분량, 중용의 미덕은 매운맛뿐 아니라 단맛, 짠맛 등 모든 맛의 세계에서도 통하는 법칙입니다. 심지어 몸에 안 좋다고 알려진 콜레스테롤, 카페인 등의 성분도 적절하게 활용하면 약이 되지만 과다한 남용은 독으로 변하는 법입니다. 식생활에서도 균형이 왜 중요한지 이제 이해되시나요?
노성열 기자 nosr@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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